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약했다. 커피 향이 카페 안에 오래 머물렀다.
도윤은 여느 날처럼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나는 카운터 위에서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엔 여전히 무거운 그늘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는 가끔 멈춰 서서 한참을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것을 깨우는 것은 늘 익숙한 소리였다.
그때, 풍경이 울렸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중년의 여자였다.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두 손을 가방 속에 꼭 넣은 채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벽을 스쳤다. 거기엔 여전히 여러 문장들이 붙어 있었다.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괜찮아요, 그 말이 답장이에요.‘
그녀는 그 문장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거기서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어서 오세요."
수연이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조심스러웠다.
손님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다가, 가방 속에서 작은 것을 꺼냈다. 낡은 엽서 한 장이었다.
"이걸... 여기 두고 가도 될까요?"
손님의 목소리는 바람에 스치는 낙엽처럼 가벼웠다.
수연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엽서요?"
"네. 그냥, 여기 두면… 좀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나는 그 엽서를 향해 다가갔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햇볕에 바랜 그림 한 장. 오래된 등대가 파도 속에 서 있었다. 그림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지만, 등대의 불빛만은 선명했다. 누군가가 그것을 수없이 만졌던 흔적이 있었다.
손님이 말했다.
"몇 해 전, 이사 간 옆집 우편함에서 이 엽서를 봤어요. 주소도, 이름도 제대로 적혀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비어 있었거든요. 반송해야 했는데, 그림이 너무 예뻐서 그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냥 가지고 있었어요. 하루 이틀이면 돌려놓으려 했는데, 결국 몇 년이 지나버렸어요."
수연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오늘 여기로 오신 거예요?"
손님은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서랍을 정리하다가 이 엽서를 다시 봤어요. 뒤에 쓰인 글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어요. 짧은 문장이었는데, 읽는 순간… 그냥 울고 싶어 졌거든요."
그녀는 천천히 엽서를 뒤집었다.
시간의 음영만 남은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작게라도 기억해 줘요. 그게 나에겐 세상 전부였으니까."
그녀는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 말을, 그냥 제가 훔쳐버린 것 같았어요.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고백이었을 텐데… 그걸 제가 몇 년이나 붙잡고 있었네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오래된 바다의 빛이 출렁이고 있었다.
등대의 불빛이 그 눈 속에서 작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여전히 그 불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수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여기 두세요. 이곳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머무는 곳이니까요."
"정말 괜찮을까요?"
"물건이든 마음이든, 누군가를 향해 있었던 거라면, 언젠가는 닿을 거예요."
손님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엽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끝이 떠날 때, 나는 엽서에 스며 있는 냄새를 느꼈다. 오래된 시간의 냄새, 돌려보내지 못한 기억의 냄새.
손님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가 문을 나서는 순간, 풍경이 다시 울렸다.
딸랑.
남겨진 엽서 위로 햇살이 비쳤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등대의 불빛이 잠시 깜박이는 걸 보았다. 그건 분명 그림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진짜 불빛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작게라도 기억해 줘요…’
그 문장은 벽의 문장들과 나란히 서서, 이곳의 공기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도윤이 다가와 엽서를 바라봤다.
"누가 두고 간 거야?"
수연이 말했다.
"이사 간 옆집으로 온 엽서래요.
그림이 예뻐서 몇 년 동안 가지고 있다가, 이제야 돌려주는 거래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벽에 붙이자."
그는 엽서를 다른 메모들 사이에 걸었다.
파도 위의 등대 그림이,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문장 바로 옆에 자리 잡았다.
나는 그 둘을 바라보다가, 꼬리를 천천히 감았다.
어쩌면, 그 엽서의 주인도 언젠가 이곳을 지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이 불빛이, 길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잠시 비출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밤이 되었다.
벽의 엽서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그건 등대가 아니라, 기억의 불빛이었다.
보내지 못한 말은 때로 이렇게 남는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누군가의 마음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날 카페의 공기 속에서, 도윤의 마음에도 아주 작게
새로운 불빛 하나가 켜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