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카뮈 17 - 이름의 그림자

by HeartStory

편의점 사장이 문턱을 넘자 카페 안의 공기가 순간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커피 냄새가 남아 있었는데, 그 냄새 위로 비 냄새와 낯선 기척이 겹쳐졌다.

나는 의자 위에서 꼬리를 내리고 숨을 고르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벽 쪽을 둘러보았다. 눈길이 어느 한 문장에 머물렀다.

"나는 그때,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편의점사장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는 손끝으로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문장, 참… 묘하네. 이 메모를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그 말과 함께, 나는 공기 속에 어떤 조용한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

사람들이 '생각났다'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속에서 잊힌 이름들이 천천히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다.

"도윤 씨." 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어제 얘기했던 우리 조카 말이야. 그 애 이름이… 미라였거든."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윤의 눈빛이 어딘가로 흘러내렸다. 얼굴이 잠시 비워지는 듯했다. 마치 지난밤 꿈의 잔상이 현실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공기 속의 떨림이 내 안으로 번졌다. 그 파장은 도윤의 눈 속에서 불규칙한 파형을 그렸다.


사장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전에 그 아이 얘기했었지. 학교 다니다가 전학 가고… 그 후로... 근데 요즘 들어 이상하게, 여기 올라오면 그 애가 자꾸 생각나네. 저 녀석 이름이 미라라서 그런가? 어제 이 문장 봤을 때도, 괜히 그 애가 떠오르더라고. 꿈에도 몇 번 나왔어." 전과는 다른 측은한 감정이 묻어 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묘하게 흔들리는 부분을 들었다.

죄책, 그리움, 후회.

사람의 말속엔 그런 것들이 희미한 온도로 섞여 있다. 나는 그 온도를 떠난 적이 없다. 마치 체온 속에 그것들을 가둔 것처럼.

도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미라라는 이름, 참 예쁜 이름이죠."

"그렇지?" 사장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 이름 중에 그렇게 맑은 느낌 나는 것도 드물지. 조카가 어릴 땐 늘 웃던 애였는데…"

그녀는 말을 잠시 끊었다.

"근데 세상일이 그렇잖아. 애들이 다 같은 방향으로 자랄 거라 믿고 그러기를 바라지만 어느 날 보면 다 각자의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고."

그녀는 커피 향을 맡듯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가 학교에서 좀 힘든 일 있었대. 그땐 그냥 난, 그런 일은 누구나 겪는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윤의 마음이 천천히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조카 이름이 미라라고 하셨죠?" 도윤이 낮게 물었다.

"응, 미라. '이미라'." 사장이 웃었다.

나는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가 위로하듯 머리를 기대고 가르랑거렸다.

"희한하지? 이 녀석 이름도 미라잖아. 이 녀석이 카페에 살기 시작할 무렵에 한 번 물어본 적 있었는데, 혹시 이 녀석 이름 지을 때 알고 그런 건 아니지?"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우연이예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그런 우연도 다 있네. 고양이도 참 똑똑하게 생겼는데, 그 애도 그랬어. 조그맣고, 머리 좋고, 뭐든 금방 배웠지."

그 말에 나는 살짝 꼬리를 흔들었다.

그 아이도 나처럼 귀엽고 똑똑했을 거야. 이름이 같다고 해서 꼭 닮았을 필요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그 아이가 웃던 모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웃음 어딘가에 아주 오래전 내 기억의 파편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회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 애 이야기를 했더니 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야.

아픈 상처는 가릴수록 곪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이렇게 아픈 구석을 말로라도 드러내면 좀 편안해지니 말이야. 여기 올라왔다가 내려가면 다이어트를 한 기분이야. 카페가 아니라 헬스장 같다니까. 미라의 마법인가? 이 녀석 오고 나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리고 화면을 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가며 문 앞에서 말했다.

"쓸데없는 말이 많았지. 고마워. 이렇게 들어줘서."


문이 닫히고 나서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벽의 메모 쪽을 향해 걸어가더니, 어제 붙인 문장을 바라봤다.

'나는 그때,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장과 방금 들은 이름이 서로를 바라보듯 겹쳤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은 적 있지?"

그는 대답 없이 손끝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손짓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미라라는 이름…"

그가 중얼거렸다.

"익숙한데, 왜 익숙한지 모르겠어."


나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어떤 파문이 번졌다. 마치 물 밑에서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가 조용히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나는 카페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흩어진 꿈을, 기억의 파편을 주워 보려고.

벽에 붙은 문장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문장들은 마치 사람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한 문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멈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름이란, 결국 다시 불리는 기억이구나.'


그때였다.

카페 창가 쪽에서 빗방울이 유리를 쳤다. 그 소리는 짧고 또렷했다.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물에 젖은 종이의 속삭임처럼.

“이미라.”

나는 그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잃어버린 이름이기도 했다.


나는 빗방울과 내 모습이 어린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이름은 단지 부르는 소리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이름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의 기억을 동시에 깨운다는 것을.

이제 그 기억이 깨어나고 있었다. 내 안에서, 그리고 도윤의 안에서.


새벽의 비가 다시 내렸다.

유리창에 어린 물결이 흔들리듯, 우리의 시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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