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교환하는 일은 회사 생활의 기본 영업행위다. 옛~날 옛날에는 명함만 넣는 파일을 문구점에서 구매해 관리했다. 사진첩처럼 해가 거듭될수록 그 명함첩이 늘어나 책상을 차지했다. 주기적으로 연락이 두절되거나 이직을 한 사람 명함을 버리거나 교체했다. 그러다가 명함을 꽂아서 쭉 돌려보는 도구가 나왔다가 연락처만 입력하여 저장할 수 있는 기기가 나왔다. 벽돌 같은 휴대 전화기가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무렵이다. 기술은 점점 발달하여 지금은 ‘리멤버(remember)’라는 대표 앱이 생겼고 많은 사람이 그 앱으로 명함을 관리한다. 상대방의 이직 경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편리함이 있다. 나는 아직 그 앱을 쓰지 않는다. 대신 회사 그룹웨어를 이용한다. 처음 만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장하고 나서 보면 이미 만났던 사람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상대방 역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그리 심하게 미안하지는 않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인 것 같은데 명확한 기억이 나지 않으면 솔직히 말한다. “지난번에 뵌 거 같은데, 맞죠?” 하면서 명함을 준다. “제가 팀을 옮겨서 새 명함을 드릴게요” 이렇게 요령껏 설명하면서. 그러면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본인의 명함을 준다. 나중에 시스템에서 이름을 검색해 보고 저장이 되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 중복 입력을 방지하고, 만났던 사람을 최대한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떤 경우에 어디서 만났는지를 적어놓으면, 나중에 행사장이나 어떤 곳에서 마주쳤을 때 당장 기억나지 않아도 나중에라도 기억이 나서 도움이 된다.
회사 시스템에 저장해 둔 명함 기록은 족히 천 명이 넘는다. 이 회사에 다닌 십수 년의 기록이니 그 정도 양이 될 만하다. 업무 특성상 만나는 사람이 많다. 행사장에서 일회성으로 만난 사람, 몇 차례 만난 사람, 업계에서 수년간 반복적으로 만난 사람 등등. 비단 이 회사 업무로 만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처음 하면서부터 만난 사람을 세어보면 수천 명을 거뜬히 넘길 것이다. 새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스쳐 보냈는지, 스쳐 지나갔는지 놀랍다. 비록 일회성 만남이어도 몇 시간은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 머물렀을 테니 그 경우는 같은 기억과 추억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전한 타인인데 어떤 특정 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억을 함께 공유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 중 일회성 만남이라면 만남일 수도 있는 어떤 한 분은,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기셔서 지금도 기억나는 분이 있다. 그분은 정작 본인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셨는지 전혀 모르실 것이다. 그저 하던 대로 행동하고 말씀하셨을 테니 말이다. 이 분은 내가 평생 만나본 사람 중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구나’를 깨닫게 해 준 분이다. 박완서 작가의 책 중에 “나를 닮은 목소리로”라는 산문집이 있다. 그 산문집 중 ‘교감’이라는 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품위만은 오직 시간의 더께만이 은근히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이 문장을 읽으며 그분이 떠올랐다.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피상적으로 알려진 정도로만 나도 알 뿐이다. 다만, 3박 4일을 함께 지내며 나눈 대화와 행동을 보고 느끼게 된 것이다. 소위 배경이 좋은 집안, 교육을 많이 받고 좋은 학교를 나온, 돈이 많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훌륭한 분이다’라는 인상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잘난척하거나, 상위층에 속해 있다고 믿고 겸손한 척하거나(실제로는 겸손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하대하거나 (그는 하대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몸에 배어있었다. 덕분에 내가 서민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계층사회라는 것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뭐라도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내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린 분이다. 2012년에 만난 그분은 무형문화재로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리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하셨다. 해외 잠재 관광객에게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할을 요청했는데 기꺼이 응해주셨다. 인파가 몰리는 전시장 한쪽에 조그맣게 마련된 테이블에서 성심성의껏 설명을 하시고 시범을 보이시며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행사장에서 대충 때우는 수준의 점심을 잘 드셨고, 실무자와 같은 숙소, 객실에 묵는 것을 쉽게 수긍하셨다. 아마도 다른 행사, 다른 경우였더라면 의전을 받으셨을 분인데 우리 행사의 특성과 상황, 본인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셔서 남들과 같은 대우를 이해하셨다. 그분은 본인의 분야에서 최고 정점에 오른 분답게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었다. 자연의 꽃, 그 꽃에서 나오는 색깔, 염색, 천과 실을 만드는 것 등을 차분히 설명하셨는데, 그 말을 들으며 이분의 인생은 어쩌면 이렇게 자연을 닮아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로 돌아와 일상에 복귀한 후, 그분이 보여준 3박 4일 동안의 모습은 어쩌면 포장한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뜻밖으로 먼저 연락을 주셨다. 중국에서 “서울 가면 점심같이 하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의상 하는 빈말로 받아들였었다. 당연히 먼저 연락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분은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계신 분이었는데, 나만 일회성 만남으로 치부하고 있던 것이다. 속마음으로는 잠깐 본 사이에 아는 척하고 친한 척한다고 할까 봐 거리를 둔 측면도 있다. 으레 ‘높은 양반’들은 현장에서 좋은 소리로 격려하고 뒤돌아서면 잊게 마련이니까. (그나마 현장에서 칭찬하고 좋은 말 하는 사람은 진짜 양반이다. 대개는 ‘수고했다’라는 말도 인색하게 군다)
그분은 1년에 한 번 개방되는 그곳에 우리를 하루 전에 초청하여 먼저 둘러보게 하시고, 집으로 직접 부르셨다. 소박하게 국수를 준비했다고 하시며 음식상을 차려주시는데, 그렇게 품위 있는 밥상은 처음이었다. 정말 국수만 있었을 뿐인데, 진수성찬으로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음식 맛은 특별히 맛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말씀으로 정성껏 준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후 차 한잔을 하기 위해 거실로 옮겼을 때는 사람 수 대로 소반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반에는 차와 한과, 과일이 있었는데 개인 접시가 아니고 개인 소반이라니. 예쁜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통창을 통해 보면서 그분의 취미, 요즘 고민과 가정사를 소탈하게 말씀하시는데 그냥 이웃집 아줌마처럼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렇게 가정사를 말씀하셔도 되는 건가 싶은 내용을, 남들이 알아도 되는 건가 싶은 고민을, 정말 진솔하게 말씀하시는데 놀랐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의 속도, 차분한 말투, 웃는 얼굴, 주름 하나 없는 얼굴, 흰머리 하나 없는 검고 풍성한 머리, 한복을 곱게 입으신 모습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품위 있는 사람은 이런 모습이구나 싶은 모습. 흰머리와 주름이 없는 외모를 닮아보고 싶어 그분이 비법이라고 알려 주신 대로 각종 곡물을 갈아먹어봤지만, 꾸준한 실천을 하지 못해 그대로 되지는 못했다.
융숭한 점심 대접을 받고 훌륭한 저택과 그 정원을 둘러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후 종종 그분이 떠올라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한 번의 호의를 과하게 해석하는 것 같아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지금의 나이라면, 명절이나 연말연시에 안부 인사를 드리는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했을 텐데, 그때는 또 너무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다 얼마 전 그분과 관련된 뉴스를 접했다. 부군이 2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잠깐 인사를 나눈 모습이 떠올랐다. 디스크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걸으시던 모습. ‘세월이 벌써 10년이 흘렀구나.’ 뭔가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기억에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아 관두었다.
앞으로도 직접 찾아뵐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분은 내게 지금까지도 가장 품위 있고 우아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내 말년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