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며 슬퍼지는 일 중의 하나는 즐기던 것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때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의 한 팀장은 아침에 커피 한 잔을 꼭 마시고 하루에도 두세 번은 커피를 마시는 커피 애호가였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서 중간에 내렸다고 한다. 심호흡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데, 덜컥 겁이 났다고 한다. 응급실을 가자니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상태는 아닌 상황에서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숨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며칠 후, 병원에서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아서 그런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부정맥이나 심장에 문제는 전혀 없다고 하여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스트레스는 남들 받는 만큼 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의사 말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 나름대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커피를 마시면 그 증세가 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카페인을 삼가라는 의사의 조언도 있었기에, 그 후로 커피를 끊고 허브차 위주로 마신다고 했다. 아주 가끔 커피가 너무, 너무 마시고 싶은 날에는 연하게 한 잔을 마신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나는 커피 대신 홍차를 즐겨 마셨는데, 사십 중반 이후부터 심장이 벌렁거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여 홍차를 마시는 일이 꺼려졌다. 하루에 서너 잔을 마셔도, 잘 만 자던, 카페인과 무관한 삶을 즐겼는데, 더 이상 아닌 순간이 왔다. 절충안으로 밀크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밀크티는 이십 대 때부터 마시기는 했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 카페에서 밀크티를 마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메뉴판에 잘 없었기 때문에, 밀크티를 마시고 싶으면 우유를 따로 시켜야 했다. 그래서 잘 마시지 못했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부터, 밀크티를 주문할 수 있는 카페가 제법 많이 생겼다. 마침 홍차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없게 된 처지라 반가운 마음에 밀크티를 즐겨 주문했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 우유 거품이 잔뜩 들어간 밀크티를 주었다. 대부분은 그냥 거품을 걷어내고 마셨지만, 어떤 때는 거품을 빼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면 차가운 우유를 넣어야 해서 차가 좀 식는데 괜찮냐는 설명을 해준다. 난 거품보다는 좀 덜 뜨거운 차가 나았기에, “괜찮다”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런 가운데, 내게 딱 맞는 밀크티를 찾았다. 홍차 본연의 색에 우유를 살짝 넣으면 연한 갈색이 된다. 그 순수한 브라운에 우유 거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차 온도는 먹기에 딱 좋았다. 따뜻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이 절로 감기며, "와~~~!" 감탄의 소리가 나왔다. 평소 마시고 싶던, 내가 원하던 그 밀크티의 맛이었다. 그 후로 그 카페를 애용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체한 느낌에 식은땀이 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잘 못 먹었나 싶어 소화제를 먹고 몇 시간 지나자 좀 나아졌다. 그런 현상을 며칠 연달아 겪게 되어, 그간 먹은 것들을 쭈욱 적어보았다. 그리고 공통점을 발견했다. 뭔가 목에 걸린 듯하면서, 숨쉬기 곤란하고 체한 느낌이 든 날은 밀크티를 마신 날이었다. 그것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카페의 밀크티를 마신 날이었다. 그 카페가 아닌 다른 곳의 밀크티를 마신 날은 멀쩡했다. 알아보니, 최애 하는 카페에서 사용하는 우유와 다른 카페에서 쓰는 우유가 달랐다.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 수는 없으나, 특정 브랜드 우유가 나랑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 제품이나 잘만 마시던 우유를, 이렇게 아무거나 마실 수 없는 체질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애정하던 카페의 밀크티는 마실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카페에 갈 때마다 물어본다. “여기는 어떤 브랜드의 우유를 쓰세요?” 그러면, 백이면 백 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제가 00 우유는 못 마셔서요”라고 부연 설명을 하면, 그제야 어떤 브랜드 인지 알려준다. 우리나라도 각자의 취향, 선호를 존중해 주는 문화가 점점 확산되고 있어서 좀 세심한 카페에 가면, 오트밀이나 저지방 우유, 락토프리 우유 등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00 우유가 왜 나와 맞지 않는지 알지 못하기에 선뜻 저지방이나 락토프리로 바꿔 달라고 하지 못한다. 그렇게 음료 하나 주문하면서, 여러 가지를 확인해야 하는 일이 귀찮고, 의도치 않게 까탈스러운 손님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밀크티 주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비단 선호하던 음식, 기호식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리적인 몸의 이상 현상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면에서도 즐겨하지 않게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면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좀 들뜨게 된다. 그 들뜨는 마음을 현지 술집, 클럽 등 현지에서 ‘핫’ 하다는 장소를 찾아가, 사람들과 신나게 얘기하고 웃고 마시는 시간을 즐겼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한때는 그렇게 떠들썩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시끌벅적한 곳은, 싫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곳을 굳이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내가 관심 있고 가보고 싶은 곳 위주로 가게 된다. 최근에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 어떤 영화가 개봉하는지 모르고 극장에도 가지 않는다. 얼마 전 비행기를 탄 일이 있는데, 기내 영화를 볼 마음이 딱히 생기지 않았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 최신 영화들이 많았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비행시간 내내 영화만 봤을 것이다. 심지어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가 얼마 전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친구를 통해 알았다. 최신 유행 가요에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 듣는 노래는 모두 이, 삼십 대에 듣던 노래이고 최근의 노래라고 해봐야 사십 대에 접한 노래들이다. 가요가 그러니 팝송은 더 모른다. 영화감상과 음악 듣기는 오래도록 내 취미생활의 일부였는데 말이다.
친구들과 나누는 얘기의 절반은 이런 나이 드는 것, 늙어가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에 대한 넋두리다. 그 넋두리 반에는 이제 즐겨하지 못하게 된 일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나머지 반은 이 나이가 되도록 하지 못한 일, 갖지 못한 것, 그래서 어쩌면 영원히 할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목마름에 대해서다. 다행인 건, 넋두리는 절반만 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하는 얘기의 나머지 절반은 그래도 우리가 잘 살아왔음에 대한 대견함, 앞으로도 잘 늙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노화하는 육체가 못 내 아쉽고 슬프지만, 꼭 그렇게 나쁘지만 않은 것은, 정신은 더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자라는 만큼 몸도 젊어진다면 완벽한 인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육체가 쇠퇴해져야 알게 되는 깨달음도 있으니 이건 모두 자연의 섭리인 것 같다.
어느 날, 출근길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직장 후배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날도 나는 늙어가는 일의 목마름에 대해 주절거렸다. 그랬더니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에요.” 그렇다. 이 정도 삶이면 나쁘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나쁘지 않은 인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