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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an 07. 2024

쉼, 앞으로를 이겨낼 원동력

- 다시 전쟁터로 -


뉴질랜드를 다녀온 지 벌써 4개월이 지났다.

그곳은 지금 여름. 여기는 지금 겨울.

계절이 바뀌었다.


남극광을 보고 싶었던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오로라 관측 예보 앱을 깔고 매일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가능성 높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이 여행의 목적은 쉬는 그 자체였으므로.


보름간 여행하며 한 번도 짜증, 화를 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혼자라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 그런 환경에 나를 놓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휴가동안 회사와 연결된 일체의 것을 끊었다. 대표이사를 비롯한 본부장, 팀장들이 있는 방을 나왔다. (카톡의 '조용히 나가기' 기능은 정말 훌륭한 기능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올 수 있다니.) 쉬는 날에도 습관처럼 들어가 보던 회사 그룹웨어에 접속하지 않았다. 이메일을 열지 않았고 회사 사람들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팀원이 연락 온 것을 빼고는...)


낯선 환경에 나를 뚝 떨어뜨려 놓아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그간 잊고 있었다. 괜한 두려움으로 망설였던 시간이 무색했다.

나이 들었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 많은 곳을 여행했던 경험으로 이 세상 어디에 갖다 놔도 잡초처럼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은퇴하면 마음에 드는 동네에서 몇 개월씩 살아보기로 했다. 친구는 신나서 말했다. "너 은퇴할 무렵에 나도 일 관둬야겠다. 우리 같이 여행 다니며 살자. 얼른 남자 친구를 만들어. 커플끼리 놀러 다니게~"  그렇다. 친구는 자기 남편과 함께 다닐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다. 실현가능한 일 같지 않지만 나도 맞장구쳤다. "좋다~ 그러니까 빨리 알아봐 봐. 여기에 나하고 잘 맞을 만한 사람 없는지."

우린 은퇴할 날이 기다려진다며 웃었다. 5년 후쯤이면 돌아다녀도 괜찮은 나이라고. 아직 팔팔할 때라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 달은 약 효과가 좋았다. 여행에서 얻은 평온한 마음상태가 유지되었다. 회사에서 듣고 보는 모든 것들에 '그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너그러워졌다.

그러나 약 효과는 두 달째에 접어들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일상이다.  마음의 전쟁터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전쟁터다. 원한다면 스트레스 없는 환경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좀 더 잘 견디고 버틸 수 있다.  이 전쟁터는 어쨌든  내가 원해서 있는 곳이므로, 지지 않을 것이다.


꺾이지만 않으면 된다.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흔들려도 나를 잃지 않으면 된다. 내 중심을 잘 잡으면 된다.

쉼표는  앞으로 겪어내야 할 많은 것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돼주고 있다.

검은 구름에 가리워져도 태양은 밝게 빛나 주위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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