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광을 보고 싶었던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오로라 관측 예보 앱을 깔고 매일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가능성 높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이 여행의 목적은 쉬는 그 자체였으므로.
보름간 여행하며 한 번도 짜증, 화를 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혼자라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스트레스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 그런 환경에 나를 놓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휴가동안 회사와 연결된 일체의 것을 끊었다. 대표이사를 비롯한 본부장, 팀장들이 있는 방을 나왔다.(카톡의 '조용히 나가기' 기능은 정말 훌륭한 기능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올 수 있다니.)쉬는 날에도 습관처럼 들어가 보던 회사 그룹웨어에 접속하지 않았다.이메일을 열지 않았고 회사 사람들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팀원이 연락 온 것을 빼고는...)
낯선 환경에 나를 뚝 떨어뜨려 놓아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그간 잊고 있었다. 괜한 두려움으로 망설였던 시간이 무색했다.
나이 들었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 많은 곳을 여행했던 경험으로 이 세상 어디에 갖다 놔도 잡초처럼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은퇴하면 마음에 드는 동네에서 몇 개월씩 살아보기로 했다.친구는 신나서 말했다. "너 은퇴할 무렵에 나도 일 관둬야겠다. 우리 같이 여행 다니며 살자. 얼른 남자 친구를 만들어. 커플끼리 놀러 다니게~" 그렇다. 친구는 자기 남편과 함께 다닐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다. 실현가능한 일 같지 않지만 나도 맞장구쳤다. "좋다~ 그러니까 빨리 알아봐 봐. 여기에 나하고 잘 맞을 만한 사람 없는지."
우린 은퇴할 날이 기다려진다며 웃었다. 5년 후쯤이면 돌아다녀도 괜찮은 나이라고. 아직 팔팔할 때라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 달은 약 효과가 좋았다. 여행에서 얻은 평온한 마음상태가 유지되었다.회사에서 듣고 보는 모든 것들에 '그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너그러워졌다.
그러나 약 효과는 두 달째에 접어들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일상이다. 마음의 전쟁터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전쟁터다. 원한다면 스트레스 없는 환경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좀 더 잘 견디고 버틸 수 있다. 이 전쟁터는 어쨌든 내가 원해서 있는 곳이므로, 지지 않을것이다.
꺾이지만 않으면 된다.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흔들려도 나를 잃지 않으면 된다. 내 중심을 잘 잡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