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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Aug 24. 2024

난 골드 앤트

내게는 세 명의 조카가 있다. 여동생이 낳은 남매, 남동생이 낳은 딸. 첫 조카는 여동생의 딸이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감동이 워낙 커서 두 번째, 세 번째로 태어난 조카보다 좀 더 특별하다. 조카를 처음 봤을 때 세상에서 제일 작은 생명체를 마주한 듯, 아주 작은 아기가 가만히 눈 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이렇게 작아도 되나 싶을 만큼 작게 느껴져 만지기도 겁이 났다. 조카를 보러 여동생 집에 자주 갔다. 여동생이 아기를 데리고 집에 오는 날은 일찍 퇴근했다. 어느 날 불현듯 조카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두른 퇴근길에서 ‘보고 싶다’라는 단어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가슴에 확 박혔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그 단어가 마음에 콕 박혀 살아 숨 쉬었다. 그간 내가 알고 있던 보고 싶다는 이런 절실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머리로 학습한 단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정까지 연결되지 못한 의미만 알고 있는 단어. 감정으로 느낀 ‘보고 싶다’라는 단어는 마음이 떨리고 조급했다. 발길을 서두르게 했다. 아기 얼굴이 계속 떠올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어떤 틈도 없이 온통 조카 얼굴로 가득했다.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얼굴. 어떤 감정도 없이 그저 바라보는 눈빛을 한 얼굴. 그 얼굴이 얼른 보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렇게 특별한 첫 조카에게 무언가를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다. 다른 조카 두 명한테 주는 것도 아깝지 않지만, 뭔가 주고 싶을 때 떠오르는 건 첫 조카가 먼저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면 첫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싶다. 마음이 좀 더 간다. 부모님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중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걸 알았다.      


두 번째 조카는 여동생의 아들이다. 귀엽고 의젓하다. 세 살인가 네 살 때 목욕탕에서 넘어져 크게 다친 일이 있다. 엄마와 무슨 얘기를 하느라 정말 잠시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의 숨넘어갈 듯한 울음소리에 놀라 살펴보니 턱 밑 살이 찢어졌고 피가 철철 흘렀다. 급하게 손으로 지혈하고 응급실로 갔다. 다행히 택시가 금방 잡혔다. 여동생이 남매를 맡기고 외출한 사이 일어난 일이라, 엄마는 큰 조카를 데리고 나는 둘째 조카를 껴안고 정신없이 뛰어갔다. 응급실에서 찢어진 부위를 꿰매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던 작디작은 아이가 어느 순간 울음을 딱 멈추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고개를 젖히며 치료를 받았다. 꼬맹이가 저렇게 의연할 수 있다니. 조카는 크면서 더 의젓해졌다. 한창 사춘기를 겪을 나이인데 제 엄마에게 잘 반항하지 않는다. 잘 참고 속이 깊다. 너무 참아서 병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세 번째 조카는 남동생의 딸이다. 처음 봤을 때 남동생과 엄마의 얼굴이 언뜻 보여 깜짝 놀랐다. 유전자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싶었다. 조카는 손톱마저 제 아빠와 똑 닮아서 볼 때마다 신기했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닮아 조용하다. 먼 곳에 살아 자주 만나지 못하는데 나를 볼 때마다 어색해한다. 그 어색함이 수줍음에서 나온다는 걸 알지만 가끔 여동생 남매들처럼 허물없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다. 내 경우도 그렇고 주변에서 봐도 고모보다 이모와 친한 경우가 더 많다. 고모는 대하기 어렵고 딱딱한 느낌의 상대라면 이모는 말랑말랑하고 편한 사람이다. 아마도 자주 봐서 그럴 것이고 엄마의 영향일 것이다. 엄마에게 시누이보다 자매가 더 친하고 편했을 테니 그 모습을 본 나는 자연스럽게 이모를 더 편하게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남동생 딸이 나를 어려워하는 걸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나도 ‘이모’라는 단어가 ‘고모’보다 익숙하다. 그래서 자꾸 셋째 조카에게 말할 때 “이모는~”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한다.             

 

조카들이 유치원생이었을 때 엄마는 “너도 네 자식 낳아야지. 조카에게 잘해줘 봐야 아무 소용없다”라고 하셨다. 생일, 어린이날, 명절, 입학, 졸업 등 때마다 선물과 용돈을 챙기는 모습을 반기지 않으셨다. “네 자식은 더 귀엽고 예쁠 거다”라며 자기 핏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조카는 아무리 예뻐해도 그 애들이 크면 아무 소용없다고. 제 부모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조카들이 중, 고등학생이 되고 스무 살이 되자 더 이상 그런 말씀은 안 하신다. 대신 조카들에게 “이모(고모)가 너희들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지 알지? 이모(고모)한테 잘해야 한다”라고 당부하신다. 그러면 조카들은 씩씩하게 대답한다. “네!” 엄마는 아마도 훗날 혼자 남을 딸에게 조카들이 ‘보호자’로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 말씀처럼 나는 한 다리 건넌 사람이다. 제 부모보다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잘해 준 이모(고모)에게 고마움은 느낄지언정 1순위가 될 수 없음을 잘 안다. 아무렴 그런 건 괜찮다.


친구들도 제 자식들에게 기댈 생각 없는 친구들이 많다. 하물며 난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 조카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좋다. 그 아이들에게 주는 건 아깝지 않다. 기쁜 마음으로 행할 수 있어 뿌듯하다. 결혼했다면 몰랐을 기쁨이다. 내 자식이 있었다면 조카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조카들은 내가 인간의 본성을 발현시키게 만드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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