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은퇴하고 뭐 할 거야?” 가을이 깊어지는 11월에 후배 동은과 만났다. 동은은 일로 만난 두 살 아래 동생이다. 30대 때 그녀가 다니던 회사와 내가 다니던 회사가 사무실을 같이 썼다. 사장끼리 친구였다. 그 후 언니, 동생으로 친해졌다. 동은은 중간에 직업을 바꿔 안경 사업을 했다. 사업이 꽤 번창했었는데 코로나 시국에 전 세계 물류 흐름이 막히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입은 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어. 근데 확실한 건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진 않아. 여태 쌓은 경력을 버리는 건 좀 아까울 수 있는데 앞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어” 나는 막연하지만 희망찬 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난 그게 없어서 고민이야. 회사원이 비전 없어서 사업한 거라 직장생활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고. 뭐, 오십 넘은 여자를 쓰겠다는 곳이 어디 있을 것 같지도 않고. 20대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야. 어떻게 먹고살지를 또 고민해야 한다니” 그래도 20대 때처럼 막막하지는 않다면서 웃었다.
20대 때 취직하고 난 후 모든 걱정이 끝난 것 같았다. 몇 년 회사 다니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살 줄 알았고 그 과정에 ‘돈’을 염두에 크게 두지 않았다. 아마도 결혼해도 일할 생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과 둘이 벌면 풍족할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글쎄, 더 풍족하게 살았을지 혹은 더 어렵게 살았을지 미지수다. 내 또래의 기혼자는 남녀불문 아직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대학 졸업까지, 취직할 때까지, 결혼해도 집은 마련해 줘야지 하며 부양가족을 위해 일한다. 반면, 나는 목돈 들 곳이 크게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살았다. 더 많이 벌지 못했어도 쓸 곳이 적었으므로 나를 건사할 수 있었다.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직장을 오래 다닌 덕에 저축하고 여행하고 공부하고 잘 지냈다. 부자는 아니지만,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수성가한 스스로가 대견하다. 하지만 정년 이후의 삶은 또 고민해야 한다. 특히 혼자인 사람은 더욱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남편, 자식, 부모, 형제에게 기댈 수 없다. 게다가 100세 시대라고 한다. 지금 60대는 예전의 40대 신체라고 한다. 그만큼 늙지 않았다는 의미다. 환갑잔치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주위를 돌아봐도 예순은 노인이 아니다. 인구소멸 위험으로 어떤 지역은 마흔다섯도 청년으로 포함한다고 한다. 정년 후 몇 년 살다가 죽는 시대가 아니므로 육십 이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20대 때처럼 다시 원점인 것 같다. 하지만, 원점은 아니다.
그때처럼 캄캄하지 않다. 그때는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어 길 끝이 어둡고 깊어 보였다. 저 먼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하지만, 50대에는 길 끝이 대략 보인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이 잡혔기 때문이다. 길 중간, 중간에 어떤 일과 사람을 만날지 알 수 없는 건 20대 때와 같다. 인생은 언제나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으니까. 예기치 않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생기니까. 그래도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하기 쉽다. 비혼자인 나는 남편, 자식 같은 변수가 없기 때문이다.
“맞아. 20대 때와는 다르지. 웹툰이나 웹소설 보면 2회 차 인생을 살며 1회 차 때 실패했던 일을 만회하거나 복수하며 성공하잖아. 우린 20대 때나 지금이나 인생 1회 차여도 그때 몰랐던 걸 알고 있는 게 많으니까 우리한테 맞는 일을 잘 찾아낼 거야. 여태 살아온 경험이 헛된 건 아니니까. 2회 차 인생은 아니지만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 잘 생각해 보자.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할 수 있는 거,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해 보자. 조급해하지 말고”라며 낙천적으로 말하자 동은은 피식 웃었다.
“큭, 언니의 그 웹소설 사랑은 여전하구나! 그래, 최소한 내가 뭘 싫어하고 뭘 하면 안 되는 줄은 아니까. 똥인지 된장인지는 이제 구분할 수 있으니까. 실업급여받으면서 천천히 궁리해 볼게”
몇 달 후 동은이 전화했다. “언니, 고령화 사회라고 하는데 노년층 대상으로 뭔가 사업하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후배 미영이 떠올랐다. 퇴사 후 대학원에서 노년학(Aging Tech)을 공부하고 있고 틈틈이 내게 사업같이 하자고 농담처럼 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