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꿈은 소설가였다.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 돼 못 갔다. 그때는 등단해야 작가가 되었으므로 원하는 과에 진학하지 못하자 길이 막힌 것 같았다. 대학 때는 성우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이전부터 외화를 열심히 보며 성우들의 목소리를 듣고 자란 탓인지 ‘천의 목소리’를 가진 그들을 동경했다. 양지운, 배한성, 장유진, 유강진, 주희, 이선영, 김도현, 권희덕 성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나는 특히 성우 장유진을 좋아했다. 그 당시 여주인공 목소리를 거의 다했다. 어린 마음에 나중에 애를 낳으면 이름을 유진으로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김세원은 지적인 목소리로 해설을 주로 했는데 늘 듣기 좋았다. 그 영향으로 대학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동아리 활동을 했다. 졸업 후 KBS 성우 시험에 응시했으나 똑 떨어졌다.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섰다. 소설가든 성우든 부모님이나 주위에 꿈이라고 말한 적 없다. 실력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십중팔구 “네까짓 게 감히?”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창피했다.
회사에 다니며 일벌레로 살았다. ‘일 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밤새워 일하기를 숱하게 했다.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퇴근하며 뿌듯해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니 먹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안 해도 될 일까지 했다. 티 나지 않아도 해놓으면 좋다고 나만 아는 일을 완벽히 하던 때도 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한 명언 중 이 말처럼 그 당시 나를 가리킨 말이 없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이 없다 (There is nothing so useless as doing efficiently that which should not be done at all)” 이 말에 공감한 게 불과 4~5년 전이다. 나는 지나치게 완벽주의로 일했다. 그 말에 공감했지만, 실천하는데 또 몇 년이 흘렀다. 세 번의 번 아웃을 겪고, 회사 일로 힘들어 심리상담을 받고 난 후에야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회사에 전념할 필요가 없음을, 일과 삶의 균형, 그야말로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 무렵 성북동 소행성의 북 토크에 참석했다. 한민경 작가의 타로와 수비학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 해의 운명이 그 당시 내 마음 상태와 일치했다. 그때 후배 미영도 함께 갔는데, 미영의 상황과 딱 맞아서 둘 다 정말 신통해했다. 그 운명에 힘입어 미영은 그해 퇴사했다. 평소 운명의 수레바퀴가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확인받은 것 같았다. 마침 임금피크제를 앞두고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환한 낮에 퇴근하는 습관이 들지 않아 아직도 6시에 칼퇴근할 때면 기분이 아주 묘하다. 시간을 엄청 많이 번 느낌이라 좋으면서도 낯설다. 취미생활이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그림, 연극, 글 쓰는 시간을 분배하고 이것들로 뭔가를 더 할 생각을 하면 즐겁고 설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낼 시간이 기다려진다.
“정년 후 뭐 하며 살 거야?”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놀 거야”라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올해부터는 당당하게 말한다. “예술가가 될 거야”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뜨악해하는 표정이지만, 차마 대놓고 코웃음을 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 그래”하며 대꾸하는 정도는 양호하다. 어떤 경우는 제대로 못 알아들은 척 다른 화제로 말을 돌린다. 예술가라니. 뭔가 거창하고 굉장한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위대하거나 유명한 예술가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다. 내가 정의한 예술은 내 안의 것,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것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 표현방식은 나만의 것이고 그걸 표현하며 살면 예술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