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넌 정체가 뭐니
Ep 3. 소중한 인연
2022. 8. 26(금)
(시간의 경과)
- 야간근무가 끝난 아침 사무실 구석에서 우리가 그렇게 ‘신체검사’라 비아냥대던 ‘건강검진’을 받았다.
- 선생님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초음파로 췌장에 뭔가 보인다는 소견을 들었다.
- 점심시간 전, 급하게 신도시 코너 대형상가의 내과에서 초음파를 다시 보고 소견서를 받았다.
우리는 그저 한 손을 잡은 채로 차에서 아무 말하지 않고 집 근처에서 가장 큰 2차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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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인연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더한 미사여구를 생각해내지 못해 그저 소중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나의 인연들.
나는 10년 전 삼수의 결과로 원치 않던 대학의 간호학과에 입학을 했다.
고작 1년 지내고 적성에 안 맞다는 이유로 공대로 전과를 해서 나는 지금은 간호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 시절 짧은 1년의 소중한 인연들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의 동기들은 벌써 서울, 경기권 대학병원에서 7년여를 근무한 간호사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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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향하던 2차 병원에도 나의 간호학과 동기가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바로 톡을 보내고 교수님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서야 생각해 보니 앞뒤 말 다 자르고 내 할 말만 했던 것 같다.
예약이 필요하니 좀 알아봐 달라고, 우리 누구에게 가야 하니?
내 연락을 받고 10분 뒤 바로 도착한 동기의 카톡
“언니 오늘 췌장 봐주시는 교수님 진료 오후에 있어. 그냥 바로 와. 1시 20분으로 예약했어.”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이었을까, 간호사 동기는 감정을 전혀 녹이지 않고 예약완료에 대한 메시지만 보내왔다.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우리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병원 대기실에 기대어 있었다.
은행 창구 같은 대기실에서 번호표를 뽑고,
가만히 벽에 기대어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언니, 나 왔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나를 깨우는 소중한 인연.
동기를 보자마자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를 꺼내려다가 왈칵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왜 이러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눈물을 삼켜보려 애를 쓰지만 자꾸 흐른다.
눈이 벌게진 와이프가 부끄러웠는지 오히려 남편이 대신 고맙단 인사를 전했고,
다음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다시 그녀는 근무지로 돌아갔다.
예약시간이 되고 간호사 동기가 예약해 준 외과 교수님을 만나 뵈었다.
준비해 간 초음파 사진과 소견서를 보시더니 바로 CT촬영을 예약하자고 하셨다.
어쩌다 보니 남편은 아침부터 쭉 공복이었기에 CT촬영이 곧바로 가능했고,
그렇게 1층 촬영실로 함께 내려갔다.
Ep 4. 유난히 파랗던 그날의 하늘
CT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오후 4시경, 당시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던 아이 둘의 하원시간이 다가왔다.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 바로 하원길로 향했다.
마음이 허해서였을까, 아이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유난히 맑았던 그날,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비눗방울도 불고, 나뭇가지로 흙도 파고, 분수도 보고
소리 내어 까르르 웃어대며 이보다 더 순수할 수 없는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분명히 눈은 웃고 있는데, 입은 즐겁다고 말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파란 하늘만큼 슬펐다.
어찌 이렇게 하늘이 맑고 파랄 수가 있는 건지
더 많이 슬펐다.
아이들에게 나의 감정이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
흐르려는 눈물을 파란 하늘을 보며 꾹 참고 또 참았다.
남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고, 그저 식은땀이 가득한 손만 꼭 맞잡았다.
그렇게 파란 하늘의 그날이 지나갔다.
Ep 5. 대체 넌 정체가 뭐니
당시 아직까지 어린아이들과 분리수면을 하지 않고 한 침대에서 자던 우리 가족이었다.
그날 밤,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남편은 한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잠이 들었다.
남편이 잠이 든 걸 확인하고 그제야 핸드폰을 켜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췌장종양, 췌장염, 췌장염 치료 방법, 췌장암, 췌장암 예후......’
쏟아져 나오는 정보라기엔 생각보다 많은 정보들이 나오지는 않았다.
복사 붙여 넣기로 도배된 일률적인 의료 지식들이었지만
같은 글을 계속 보는데도 잠이 오지는 않았다.
기대고 싶었던 걸까, 믿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보고 싶은 글만 보다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2022. 8. 27(토)
다음날 저녁이 되고, 어제 그렇게 헤어졌던 간호사 동기에게 톡이 왔다.
“언니, 내가 CT판독결과를 먼저 봤는데 혹시 통화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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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에서 CT나 MRI 같은 촬영을 하면 보통은 다음 진료일에 교수님께 결과를 듣게 된다.
교수님 진료 예약이 아무리 빨라도 며칠은 걸리기 때문에,
그럴 때는 각 대학병원 인터넷 사이트의 의무기록사본 발급 페이지에서 조회를 하면 판독결과를 빠르게 알 수 있다.(보통 3-5일)
교수님들께서도 보통 판독지에 적힌 판독결과를 보고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먼저 판독지를 살펴본 뒤 필요시 타 병원 예약을 먼저 진행하거나,
병의 상황에 대하여 미리 공부를 하고 교수님 진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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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주 월요일 교수님 예약이 잡혀 있었는데,
간호사 동기 덕분에 판독결과가 나오자마자 그래도 주말에 미리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되었다.
(홈페이지에서도 조회는 가능함)
“위와 췌장 사이 6~7cm 되는 종양이 보이며, gist로 추정됨.”
동기가 알려준 남편 뱃속에 있던 그놈의 정체였다.
일단 췌장 내에 있던 덩어리가 아니었고, 위치로 보았을 때 위와 췌장 사이에 있다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크기는 왜 이렇게 큰 것이며, 대체 gist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네이버에 gist를 검색해 보았다.
“gist" 위장관 기질종양. 위장관 벽에서 발생하는 희귀 질환. 양성에서 악성까지 다양함. 내시경이나 수술 등 추가 검사가 필요함.
암.
양성 종양일 수 있다면서 또, ‘암’ 이란다.
더 이상의 생각의 흐름을 멈추어야 했다. 여기서 더 얽고 설키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미 머릿속엔 충분히 꼬인 실타래들이 엉겨 있었다.
일단 남편 뱃속에 있던 그놈의 정체를 확인했고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 수 없다.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방향을 잡고 더 큰 병원을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우리는 3차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계속 되묻는 궁금증,
대체 넌 정체가 뭐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