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홈을 발견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므로 관리인에게 인터폰을 넣지도 않았다. 그것은 은둔생활에 깊숙이 침투할 위력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없이 말 그대로 홈일 뿐이었다. 빌리지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었고 휴대폰을 해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경은 안정을 찾아갔다. 방 곳곳 허술한 부분을 너그럽게 넘겨버렸다. 이전 거주민의 흔적이 간간이 보이더라도 인상을 찌푸렸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흔적은 쉽게 지워졌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은 관리인이 락스로 말끔히 없애주었다. 홈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일 것이고 관리인 손안에서 해결될 리 없는 문제를 들쑤시면 원인 규명을 위한 측량기사와 인부 몇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혼자 보내기에도 부족한 여생을 시끄럽게 보내지 말자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런데 홈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전보다 오래 홈을 응시하고 좀더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홈은 얇지만 깊었다. 방음벽면을 뚫고, 시멘트를 뚫고, 옆방의 벌레 따위가 넘나들 수 있을 정도의 두께지만 그 정도로 깊이 패인 것이다. 처음 빌리지로 들어왔을 때 홈을 본 기억은 없다. 날짜를 잊고 지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되었다고 가늠할 수도 없는 날 동안 지진이 일어난 적도, 옆방에서 인공적인 힘을 가하는 소음이 들려온 적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홈이 나 있고 신경을 기울인다면 옆방 거주민의 옷깃이 스친다든가 하는 것 아니면 적어도 벽지의 색깔을 알 수 있을 지경이다.
날짜를 잊고 지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되었다고 가늠할 수도 없던 어느 날,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속을 후벼 파는 듯해 잠에서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홈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등을 구부리거나 발을 돋울 필요 없이 홈은 침대 위 눈높이에서 좀더 커져 있었다. 옆방에서 날카롭게 벽을 긁어댔던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인터폰을 집어 들다 말고 홈을 들여다보았다. 넓어진 홈으로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젊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여자가 잽싸게 홈에서 멀어졌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현관을 넘자마자 여자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이어 남녀의 신음소리가 섞여 불분명하게 홈을 통해 들려온 탓이었다. 홈 위로 포스트잇을 두어 장 붙였다. 아무 명명도 써넣지 않은 백지였다.
책꽂이에 꽂힌 책은 빌리지로 들어올 때 택배로 부쳐야 할 만큼 꽤 많은 양이었지만 모두 세 번 이상 읽었던 것들이고, 방문객도 없으니 오로지 자족을 위한 전시품뿐인 셈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지가 오랜만이었다. 상념은 어느 때고 불쑥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이렇듯 바로앉아 골몰해보기도 오래 전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벽에 난 홈 때문일 줄은 어떤 상념 속에도 섞여 있지 않던 예외였다. 사내는 불쑥불쑥 탄성처럼 욕을 뱉었고 여자는 아무 단어도 모르는 원시의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인력으로 벽을 뚫는다는 것이 가능하다 한들 고작해야 쇠꼬챙이인 것으로 파낸 홈으로 이웃이 내는 괴성이 신경을 긁을 정도로 또렷이 들려온다는 건 말이 되는 말인가. 괴성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다 베인 실금 같은 상처에 피가 비쳤다.
며칠 동안 거의 잠들지 못했다. 이웃에서 들려오는 갖은 소음에 예민해졌던 게 사실이다. 누구라도 은둔을 위한 거처에 이 같은 궤변이 일어난다면 나 같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터폰을 들지 않았던 것은 나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불규칙한 시간대 방에 들어왔다. 관찰한 이래 여자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전혀 없었고 오직 사내만이 여자를 떠나거나 찾아올 수 있었다. 나도 온종일 입을 떼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자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가 찾아왔을 때도 사내는 명령조로(이를테면 '뒤돌아' '가만히 있어' '입어' 등등), 여자는 인사는 물론 반항이나 순응의 말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괴성이 평온을 침투하고 들어올수록 납득하기 어려운 마음은 날로 커져갔다. 그것은 평온과는 전혀 상반된 위험을 불러일으킬 행동이었지만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충동적인 마음은 구체적으로 계획성을 띠어갔다. 꽂힌 채로 한번도 손이 닿지 않았던 책장 위에 또한 손이 닿지 않았던 HD 캠코더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서툴게 영상을 담던 학생시절의 손때 묻은 물건이었다. 책상 위로 올라가 캠코더를 꺼내 쥐어보았다. 잊고 지냈던 감각이 금세 되살아났다.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을 담아낼 계획이다. 사내가 매일 어디를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짐승처럼 먹고 자고 관계를 당하는 것만 되풀이하는 여자가 영상의 전체 줄거리다. 시작은 홈을 통해 여자를 목격하게 되는 시점으로 하고 나머지는 벌어지는 사건에 맡기기로 했다. 우선 오랫동안 손이 가지 않은 캠코더 배터리를 충전했다. 후에 여자와 접촉하고 사내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며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여자와 사내에게 관심을 가지고 촬영을 계획하게 된 것은 순전히 사내의 말 때문이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사내가 다른 날과 다름없이 현관을 넘어서자마자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여자가 사내를 피해 방 이곳저곳에서 날뛰었다. 몸싸움 끝에 사내는 여자를 저지시켰고 숨을 헐떡이며 윽박질렀다.
사내가 윽박을 지르고 이어 같은 말을 또박또박 반복했지만 들은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잠잠해진 여자 위에서 좀더 분명한 목소리로,
내가 아니면 넌 아무런 가치 없는 인간이야.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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