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홈을 파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홈은 확실히 커져 있었다. 촬영이 좀더 수월해질 거란 기대가 있었지만 여전히 화면의 3/4이 벽면으로 가려졌다. 파노라마 효과 같은 게 나쁘지 않았다. 여느 HD 캠코더와 다를 바 없는 기능이었지만 유달리 줌(Zoom) 렌즈의 성능이 뛰어나서 줌-인을 하기에 간편했다. 화면의 초점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홈을 통해 벽을 넘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상하의 모두 검은 차림에 머리칼도 푸른빛을 뿜는 흑발이었다. 소매 밖으로 뻗어 나온 팔과 다리가 단 한 번도 볕을 쐐보지 않은 듯 새하얘서,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여자에겐 색이 아니라 음영만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시선에 따라서 극대화된 캠코더의 초점도 여자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각막만 한 성능은 되지 못할 것이지만 망연히 앉아서 시리얼 따위를 씹고 있는 여자의 턱관절까지도 놓치지 않고, 캠코더는 저만의 생명을 품은 듯 손의 떨림까지 제 것처럼 간절하게 담고 있었다.
나무 위의 표범이 떠오른다. 나무를 오를 수 있는 많지 않은 동물, 개중에서도 가장 나무를 오른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 표범. 포식 후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표범은 한껏 늘어지는 몸짓과 눈빛이다. 코앞으로 사냥감이 지나간대도 심드렁하니 모든 포식동물들의 휴식시간은 평화와 같은 고요가 감돈다. 물론 여자의 처지는 벽이 세상의 끝인 줄로 알고 자라나 그렇게 생을 마치는 이집트의 시와 마을 여인네들에 가까운 것일 테지만, 제 눈앞에 있는 것이 먹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 포만감 가득한 맹수의 눈빛같이 얼빠진 구석이 평화와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먹지 못할 것을 삼키는 듯이 여자의 목덜미가 크게 요동쳤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서 홈 바깥으로 사라졌다. 한 동안 빈 화면을 잡고 있다 촬영을 중단했다. 어쩌면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청력이 뛰어날 수도 있었다. 되도록 기척을 내지 않으려 했지만 사소한 소음조차 여자는 감지해냈을지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자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홈으로 보이는 것은 벽으로 바짝 붙은 침대 끝과 바닥에 놓인 다리 짧은 탁자, 굳게 닫힌 회색 현관문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는 무엇을 하며 지내는 것일까. 벽 뒤에 숨어서 담아낼 수 있는 내용이란 한계가 있었다.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여자에게 언어능력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가정 하에 노트와 필기구를 챙겨 넣었다.
사내가 돌아왔다. 정사각형의 포스트잇을 한 장만 붙이고 벽에 바짝 붙어서 사내 목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사내도 여자도 말이 없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여자와 나와 사내 사이에 벨소리만 날카롭게 울어댄다. 상대에게 비교적 공손한 어투로 곧 내려가겠다고 말하고 사내는 현관문을 연다. 여자 위로 몸을 던지던 때와 달리 동작은 누긋하고,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외팔이였다.
인터폰을 든다.
우유 속에 빠진 개구리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장난기 가득한 소년이 개구리를 잡아왔죠. 아마 넓은 개울물을 활개치고 다니는 게 얄미웠을지 몰라요. 호기심이 동해서였을지도 모르고요. 소년은 우유 담은 컵에 개구리를 빠뜨렸어요. 낯선 공간에 갇힌 개구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허우적거리는 일뿐이었겠죠. 앞발 뒷발 할 것 없이 온힘을 다해 내처 저었는데 점점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개구리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직감한 거예요. '아, 난 이대로 죽겠구나!'
웃었다하기엔 부자연스럽게 여자의 입술이 뒤틀렸다.
하지만 개구리는 우유 담긴 컵과 자기를 괴롭히던 소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죠. 죽지 않기 위해 발을 젓는 동안 우유가 굳어버렸거든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자의 얼굴에서 동요가 사라졌다. 내 말을 이해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어체계를 갖추지 않은 여자의 머릿속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헤아린다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급한 국제택배가 있다며 사내를 타운 밖으로 따돌렸다. 사내가 층계를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옆방으로 잠입했다. 현관문은 바깥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였다. 이어질 영상의 페이드인(fade-in)을 위해 그리고 여자의 경계심을 풀 요량으로 꺼낸 이야기가 자신을 빗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노트에 검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내며 장난질만 한다. 아마 사내 아닌 타인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동작마다 따라하는 것을 보아 갓난애 정도는 아니어도 모사 본능만이 남아 있을 뿐인지도.
공책을 향해 뻗어 있는 여자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바싹 마른 어깨와 등허리를 쓸어내린다. 여자는 검은 글씨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간지러운 듯 히죽거린다. 이 같은 온정도 여자에게는 처음일 터였다.
홈이 여자가 보낸 구조 신호였으리라 확신했을 때, 관리인 사내가 찾아왔다. 보수할 것이 더 이상 없느냐 묻고는 나를 쏘아보았다.
삼십 분 뒤 홈이 철저히 가려졌다.
영상 후반부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여자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빌리지를 떠나야 했다. 빌리지 행을 마음먹었던 때만큼 결연하다. 자유를 되찾은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는 일이 늘어난 때문이다. 사내가 없는 틈을 타 옆방으로 잠입하는 일이 잦아졌고, 사내는 그만큼 나를 찾아와 귀찮게 했다.
*
관리인이 외부 소통의 중계자 역할을 도맡는다는 게 이 타운 체계의 취약점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가 무슨 악행을 저지르든 고용주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외부에 이 모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인터폰을 거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다고 깨닫자 나는 자신에게 실망스러웠다. 지난날의 꿈에 부푼 은둔생활이 얼마나 허황됐는지를, 그러나 너무나 간단한 이유였다. 거주민들에게 그는 외부인일 따름이니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자신의 일에조차 무관심한 게 은둔을 자처한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잠결에 힘을 주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아 있다. 아니 그가 없어진다 한들 이미 망쳐진 여자의 삶이 복구될 수나 있을까? 잠시나마 내가 여자에게 간단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을 느꼈듯 여자에게도 내가 여태까지의 삶을 저버릴 만한 강렬한 무언가로 가닿았느냐고? 아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나는 버젓이 존재하는 사내와 여자의 존재,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존재감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이란 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런 사람들과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하고 만다.
모든 게 홈 때문이다! 홈은 홈대로 처음 생겨난 자리에서 존재감을 발산하며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단단히 막아놓은 덕에 그것은 그저 홈일 뿐이다. 이 사실이 나를 위안해주지는 못한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너머에서 여자는 얼마나 짓밟혀가고 있을 것인가, 보고 들을 수 있던 때보다 더 괴로운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관음증 환자와 관찰대상 사이에 가로막힌 커튼처럼 홈은 고통을 주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은둔을 위해 떠나온 빌리지가 이제 나에게 감옥과 같이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날짜를 잊고 지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되었다고 가늠할 수도 없던 며칠 동안, 현관이 열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