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홈을 파고 있다. 현관을 열 도리란 것도 없었고 창문은 쪽창이기 때문이다. 여자를 구출할 방법이 단지 홈을 파는 것뿐이란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자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택했던 한 가지 방법이 다시 여자를 구할 유일한 방법으로 돌아왔다. 결심하기가 무섭게 비상상황을 위해 챙겨온 연장 상자가 떠올랐다. 밤낮없이 소음을 내며 장도리로 벽을 치는데도 관리인은 아무런 주의도 주지 않는다. 빌리지에 들어올 때 건네받았던 팜플릿대로라면 사내는 지금 근무를 서고 있을 터였다.
장도리로는 턱없이 모자라게 부서진 벽을 망연히 바라보다 해머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사내에게 정신과 약 처방을 부탁했고(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처방받을 수 없다며 실랑이를 해야 할 것이다), 왕복 한 시간 남짓한 시간 안에 여자와 탈출을 해야 했다. 타깃은 홈이 아니었다. 현관 옆 벽을 뚫고 나가야 사내와 여자의 집 현관문을 열고 여자를 빼낼 수 있다는 것이 내 계산이었다. 해머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벽을 부쉈다. 나는 간신히 몸을 복도로 빼내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벽을 부수는 데 삼십 분. 현관문을 열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복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남은 시간은 삼십여 분. 서둘러야 했다. 준비해놓은 선글라스를 여자에게 씌워주었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황야 같은 타운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람은 물론 지나가는 차 한 대도 구경할 수가 없는 사막 같은 곳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곳을 오아시스처럼 여기고 찾아올 수 있었을까. 눈앞에 아지랑이가 울렁이는 듯했다. 정신을 차려 우리는 무작정 걷기로 했다. 내가 결정했고 여자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온 것이지만.
새까만 옷을 입고 흑발을 휘날리며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오히려 추리닝 차림의 나보다 세속의 사람 같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뛰다시피 걸었다. 멀리서 사내의 차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먼저 나를 이끌어 폐허가 된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마주보고 선 여자의 쇄골이 강직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큰 키였다. 우리 여기서 헤어져요. 여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적잖이 놀라야 했는데 나는 여태껏 여자가 언어체계를 가지지 못했을 거라고 당연히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을까, 같은 걸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작업실이 있어요. 사내의 차가 지나가는 것을 한참 바라본 후에야 나는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자가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응당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모르겠어요? 그 새벽 전화한 건 나라구요. 여자의 말을 한참 헤아려야 했다. 왜 나였을까.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고아인 나였을까. 나는 왜 어리석은 교만에 빠져 여자를 구하겠다고 한 것인지. 그게 내 계획이었으니까요. 여자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대답해주었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사내와 함께 살았다. 단 한 번도 빌리지를 벗어나본 적 없이. 사내를 뭐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 채 감금 당했다. 당한 건 내가 알다시피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왔다고 했다. 친족 간의 강간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긴 시간 지독하게 벌어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나는 이 대목에서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포르노 소설이 아니다. 그 과정을 지난하게 적어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고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진실만이 중요하다. 여자는 지금 여기 살아 숨쉬고 있다. 무작위였다고 했다. 단지 그날의 전화는 무작위로 건 거였고, 믿기 어렵게도 고아에 칩거를 꿈꾸는 조울증 환자가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몇 번의 반복된 전화만으로 빌리지행을 마음 먹게 될 만치 마음이 약해져 있는 사람. 그게 여자의 타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