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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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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Aug 24. 2024

<알려줘> -완-

어느 봄 저녁, 먼저 연락이 온 것은 이모가 아니라 병원이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길거리에서 난동을 피워 경찰이 강제입원을 시킨 게 지난 달이라고 했다. 두 번째부터는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니 와달라는 거였다. 그 사이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상태가 악화된 게 분명했다. 엄마는 아빠와 상의하는 대신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엄마 놀라지마, 말하는 우리 엄마 목소리가 더 떨리고 있었다. 나는 TV를 켜 놓은 채 거실에서 잠든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의 렉스턴은 먼저 외조부모의 아파트로 향했다. 뒷좌석에 나와 외조부모가 붙어 앉았다.

주말의 고속도로는 빽빽하게 막혀 있어서 차가 기다시피 했다. 아빠의 렉스턴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갈 때 외할머니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외할아버지는 한숨소리를 작게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외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아직 찬 바깥 공기와 약하게 히터가 돌아가는 차내 온도차로 유리창이 뿌옜다. 그만치 탁한 눈빛으로 외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 말없이. 수많은 말을 삼키는 것처럼 깡마른 목덜미만 출렁거렸다. 아빠는 음악이나 라디오 켜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누구도 아무런 말 하지 않는 차안이 답답하게 느껴져 차창을 내릴 때였다. 순영이, 외할머니가 입을 뗐다. 묻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이어진 말이 오래 참은 고백 같았다.


꿈결 같은 5월이었어. 내 고향 친구 순영이랑 나는 서로에게 맹세했다. 우리들 아부지 같은 남자한테는 시집 가지 말자고. 아니 그냥 시집 가지 말고 둘이서 살자고. 그때 우리는 열다섯 살 소녀였다. 술을 마시면 집안 살림을 내던지곤 하는 순영이네 아부지와 며칠씩 집을 나가 죽을 때까지 새 애인을 두던 우리 아부지가 똑 닮은 것처럼, 순영이랑 나는 닮았어. 깡마른 몸에 키도 닮고 단발머리도 닮고 노래 듣는 걸 좋아하는 것도 똑 닮았다. 같은 교복을 입어서 친구들은 자주 우리를 헷갈려 했다. 순영이를 불러야 할 때 옥이야, 하고 부르고 나를 불러야 할 때 순영아, 하고 부르는 일이 잦았다.

그때 우리가 좋아하던 가수 중 하나는 노고지리였는데 순영이가 부르는 <찻잔>이 기가 막혔다. 기교 없이 담담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청량하고 또렷했다. 아부지들이 싫어도 우리는 서로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소파에 올라가 순영이가 <찻잔>을 부르기 시작하면 마루에 앉아 팔을 흔들다가 2절은 내가 마무리하는 식이었어.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우리는 수줍은 열다섯 살 소녀였지만 나중에는 길에서도 팔짱을 끼고 걸으며 <찻잔>의 후렴구를 같이 부르곤 했다.

순영이에게는 고등학생인 오빠가 있었다. 춘영오빠는 공부도 잘하고 키도 훤칠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오직 순영이뿐이었고, 순영이가 춘영오빠 얘기를 많이 해서 열심히 귀 기울여 들을 뿐이었다. 순영이는 춘영오빠를 좋아하며 잘 따랐고 춘영오빠도 순영이네 아부지와 달리 다정다감했다. 한 번은 춘영오빠가 떡볶이를 만들어주겠다면서 나와 순영이를 식탁에 앉혀 두었다. 노고지리의 노래뿐 아니더라도 춘영오빠는 아는 게 많아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라디오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지. 춘영오빠의 말에 순영이와 나는 깔깔 웃으면서 떡볶이가 다 되기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졸이면 완성될 거라는 춘영오빠의 말에는 입안에 침이 돌았다. 그때 순영이 집안에 가득 차 있던 훈기가 지금도 느껴질 것 같다.

포크를 내려두는 일 한 번 없이 앉은 자리에서 떡볶이를 해치웠다.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춘영오빠의 눈길에서 문득 서늘함이 느껴졌어.

“순영아. 옥이야.”

춘영오빠는 웃음기 없는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번갈아 불렀다. 짧은 순간이지만 춘영오빠는 결심하듯 결연하게 말했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나는 싸우러 나갈 것이다, 배웠으나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으로 이 시대에 살아남고 싶지 않다는 게 춘영오빠의 요지였어.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순영이와 나는 즉각적으로 그 말을 알아들었다. 춘영오빠는 곧잘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순영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목이 메었지만 춘영오빠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냥 우리랑 계속 살아갈 수는 없는 거냐고 물었다. 춘영오빠는 옷자락을 쥔 내 손을 감싸쥐었다. 커다란 손이 뜨거웠다.

“너희와 계속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춘영오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광장으로 나선 사람들 중 몇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순영도 마찬가지였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우리 고향에는 나서는 사람과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어. 나에게 순영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춘영오빠는 등을 보였다. 그게 우리가 본 춘영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춘영오빠를 보지 못하도록 나는 순영이를 꼭 끌어안았다. 춘영오빠의 결정에 대해서 누구도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었다. 그를 가로막을 수도 없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게 춘영오빠 때문이 아니니까. 고향 사람들이 개떼처럼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날 거리로 나간 사람이 춘영오빠가 아니라 순영이네 아버지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살면서 여러 번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춘영오빠가 거리로 나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춘영오빠 말대로 순영이를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순영이와 나는 잠만 따로 자기로 하고 내내 함께 있었다. 우리 둘이 있는 시간 동안 일부러 춘영오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춘영오빠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고조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처럼 지내려고 노력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 순영이가 혼자 있게 되는 순간까지.

내가 집으로 돌아간 뒤 순영이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직접 묻고 싶었어. 혼자 남겨질 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은 거냐고. 저녁 무렵 혼자 남은 순영이는 광장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춘영오빠를 찾아 헤맸겠지. 두 사람은 한 자리에서 총에 맞았고 내가 두 번 다시 만지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 뒤늦게 광장에 나가 주검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을 찾은 순영이네 아부지는 술이 깨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댔어. 순영이와 춘영오빠를 잃고 나서 나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절대 내 목소리 같은 건 내지 않겠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꼭꼭 숨어 살아남겠다. 순영이도 춘영오빠도 없지만 살아서 모두 지켜보겠다. 그래서 이렇게 산 거야. 그애가 아파해도 못 본 척.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내 손을 슬며시 놓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손을 다시 잡지 못했다. 아빠의 렉스턴은 매끄럽게 IC를 빠져나갔다. 평소 거친 운전습관을 가진 아빠가 애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겪은 그 시대의 혼란을 생각했다. 책으로나 읽을 수 있을 뿐인 머나먼 이야기가 읽을 때마다 나를 뒤흔들곤 했다. 단순히 혼란으로 부르기엔 분명히 존재했던 악에 대해서 외할머니는 자기 목소리를 죽여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 친구의 죽음은 외할머니 자신 내면의 죽음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이모는”

엄마는 운을 떼는 나를 순간적으로 돌아보며 그만두라는 눈짓을 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들어주길 바랐을 거예요.”

내 말을 듣고 외할머니는 울음을 그쳤다. 외할아버지는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고, 엄마와 아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곧 차가 멈춰 섰기에 나도 내릴 채비를 했다. 병원 앞에는 구급차와 경찰차가 마주 서 있었는데 엄마아빠가 경찰관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외조부모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까맣게 썬팅된 차창 너머로 바싹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구급차와 경찰차를 번갈아 보며 이모를 찾기 바빴다. 이모는 구급차 안에 결박되어 있었다. 나를 제지하기 위해 뛰어오는 의료진들보다 빨리 구급차 문을 열었다. 다시 돌아온 봄은 우리 가족에게 이모를 돌려주었다. 넋이 나간 채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눈물로 범벅이 된 이모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주영에게


퇴원하자마자 너에게 늦은 답장을 써. 너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를 서울 집에 내려주고 가셨어. 우리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커튼 하나 없이 사방이 트인 병실에서 눈 뜨는 아침마다 나를 내려다보던 너의 표정을 잊지 않으려 애썼어.

네가 처음 우리에게 왔을 때 나는 손이 참 큰 여자아이라고 생각했지. 간이침대에 꽁꽁 묶인 내가 마치 갓 태어난 너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내가 너를 처음 만난 때처럼 너는 나를 보며 생의 의지를 다질 거라 믿었어. 같은 믿음으로 나는 성실히 치료에 임했어.

내 공간에 오롯이 혼자 남게 된 지금, 내가 만든 공백을 잘 지나와줘서 고맙다고 너에게 말하고 싶어. 나는 언제나 네 편을 필요로 할 때 곧장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저없이 돌아가 안겨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때 사람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으니까.

나는 세상의 불합리함과 싸워 이기겠다는 사명 따위 없다. 단지 가족 중 누구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랐지. 하지만 나를 가장 부끄러워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어.

상처 입히는 사람은 바깥에 있지 않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깊이 찌를 수 있는 거야. 너는 잊지 말아야 해. 너를 이해해야 할 사람은 너 자신이라는 걸.

주영아, 세상을 환대하듯 활짝 웃던 너의 표정이 내게는 살고 싶은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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