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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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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Aug 22. 2024

<알려줘> -3-


민희는 우리 반에서 키가 가장 크고 마른 아이였다. 민희의 꿈은 모델이었고, 그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장래희망이었다. 언제나 같은 길이의 짧은 단발머리를 유지했다. 운동도 곧잘 해서 피구 경기를 하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체육대회 때는 계주의 마지막 주자였다. 민희는 언제나 눈에 띄는 아이였고 나는 아니었다. 우리는 한 반이었지만 노는 무리가 달랐다. 민희가 나를 쳐다보지 않을 때 나는 내 친구 무리 속에서 그애를 훔쳐봤다.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빛이 나는 아이였다. 나는 날아오는 공이 무서워서 어쩌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빨리 죽어야 끝나는데 공을 맞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난관에 빠졌다. 무엇보다 민희가 던지는 공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빤히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아끼고 아껴서 내가 그애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으면 했다.

민희가 던진 공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때린 날 우리는 친해졌다. 민희가 나를 부축해 양호실까지 데려갔다. 늘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던 민희의 눈길에서 걱정과 미안함,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민희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서 얼굴을 찜질하는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 눈길은 이모를 걱정하는 엄마, 외할머니와 같아서 곧장 ‘불안’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 미안해. 그만 미안해해도 돼, 같은 별 것 아닌 말들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일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시시한 말을 툭툭 뱉는 나날이 계속됐다. 나는 열쇠가 달린 빨간 일기장을 한 권 사서 민희에게 건넸다. 나 이런 거 못하는데. 너는 읽기만 해.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그때 쓰고. 나는 교환일기장을 열심히 쓰고 꾸몄다. 내가 꾸민 교환일기장을 매만지며 읽어 내려가는 민희의 표정변화를 보고 있는 게 좋았다.

나에게는 이모의 이메일 주소가 남아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이모에게 할 말을 고르는 동안 가족들은 말라갔다. 외조부모는 오래된 경차를 끌고 매주 서쪽 서울로 갔다. 거기 어딘가 이모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들 삶에 남은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엄마는 언젠가 연락이 올 거라 믿으며 그런 외조부모를 말렸다. 때문에 싸움이 잦아졌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서로 사과를 잘 하지 않았다. 화도 잘 내고 사과도 잘 하고 고맙다는 말도 아끼지 않던 이모가 나 역시 그리웠지만 여전히 이메일을 보낼 수 없었다.

엄마는 이모보다 외할머니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를 테면 잘 울지만 자기 속마음을 설명하지 못했다. 작은 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더더욱 이모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이메일을 보내는 대신 민희에게 교환일기를 썼다. 대부분 내 쪽의 일방적인 편지에 지나지 않았던 교환일기를 민희가 남자친구에게 보여줬을 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냈다. 두껍게 포장된 일기장을 온 힘을 다해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민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미안해해도 된다고 그애를 달랠 일도 없었다. 우리는 분명 서로를 신경 쓰고 있었지만 절대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이모에게


저는 이모처럼 글을 잘 쓰지 못해요. 하지만 전국에 폭설이 쏟아진 어제는 평소보다 이모를 많이 생각했어요. 이모도 눈을 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이모, 제가 키우던 도마뱀 기억하죠? 이모가 이사 간 다음부터였을 거예요. 제가 미소에게 소홀했어요. 왜인지 엄마아빠에게 미소가 죽었다고 말하는 게 무서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며칠을 그대로 뒀어요. 아직 미소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요?

며칠 전 제 방에 들어온 엄마가 움직이지 않는 미소를 발견했어요. 미소는 썩고 있었어요. 엄마아빠는 무척 화가 났어요. 그때 엄마는 저를 끔찍하게 쳐다봤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어요.


여기까지 쓰고 나는 발송 아이콘을 눌렀다. 끝맺지 않은 내 이야기가 이모를 궁금하게 하기를 바라면서. 수신함과 발신함을 번갈아 확인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이모에게 이메일 보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외조부모도 서울에 다녀온 사실을 우리에게 숨겼다. 이모 없는 가족들은 자주 모이지 않았고, 만나더라도 이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따금 만나는 외조부모는 마른 장작 같았다. 밤마다 모든 눈물을 쏟아내서 수분을 잃은 몸 전체가 바싹 말라버린 걸까. 속이 상해서 고개를 돌리면 낡은 유리문을 밀고 이모가 식당으로 뛰어들어올 듯했다. 주영아, 잘 지냈어? 하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 보였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모에게


엄마는 죽은 미소를 가리켜 말했어요. 내가 너를 잘못 키운 것 같다, 어떻게 미소가 죽은 곳에서 웃고 잘 수 있었니.

옆에서 더욱 화가 난 아빠도 말했어요. 엄마아빠가 죽어도 이럴 거야?

저는 울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이모라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까지도 안아줄 텐데, 그렇죠?


민희 이야기를 쓰지는 못했다. 나에게도 비밀 하나쯤은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모를 만나게 된다면 직접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런 날이 올까?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어요, 그 친구가 제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놨어요, 마음이 없어진 것만 같은데 이모를 생각하면 다시 아픈 마음이 느껴졌어요, 같은 말을 속삭일 날. 아니다. 이모의 이야기를 듣기로 하자. 이모의 비밀을 알고 싶다고, 이모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모 자신까지 안아줄 거라고 말하자. 마침내 이모가 나에게만 비밀을 속삭일 때 나는 작은 소리로 그래? 하면서 이모를 안아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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