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엔드. 공백의 시간
샌프란시스코의 5월은 화창하다. 해가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출근길의 바람도 따뜻해진다. 하지만 회사 안의 공기는 여전히 흐릿하고 조용하다. 무언가가 바뀌었고, 또 무언가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이 내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기회’의 그림자를 닮아 있었다.
지난 1년 6개월간 나는 꾸준히 말해왔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고 싶다”라고. 정확히는 프로젝트를 주도해보고 싶다고. 단순한 도면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설계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기획, 일정과 목표를 설계하는 입장에 서보고 싶다고. 그 말을 디렉터들에게 건넸고, 가끔은 슬쩍, 가끔은 또렷이 말했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미국식 조직 안에서 ‘주니어’라는 꼬리표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계속 나를 ‘기계적으로 성실한 생산자’로만 바라보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시선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 너머를 끊임없이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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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PM이 떠난다
2025년 5월, 회사는 다시 한번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세 명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동시에 회사를 떠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누구보다 고객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현지 프로젝트를 운영하던 실질적인 축이었다. 그들의 공백은 곧 우리 모두의 공백이 될 것이고, 갑작스레 남겨진 자들은 두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제 누가 매니지먼트를 맡는가?”
“이 공백은 곧 기회인가, 아니면 부담인가?”
솔직히 말해, 이 공백은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온 사람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겠다고 말한 이후, 기회는 단 한 번도 나를 향해 걸어오지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조직은 비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워야 하는 어떤 프로젝트들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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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지 역할이 아니다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단어는 흔히 일정 관리자, 예산 관리자, 커뮤니케이터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다르다. 그것은 곧 설계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는 사람, 한 팀의 “의미”를 구조화하는 사람이다.
디자인 리드가 여러 명인 프로젝트에서, 누구도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 콘셉트는 분산되고, 결정은 지연되며, 책임은 흐릿해진다. 그럴 때 나는 ‘조율자’가 되고 싶었다. 모든 팀원이 같은 목적지를 바라보도록 정렬하고, 팀원들의 언어와 방향이 일치하도록 구조화하는 사람. 설계를 그리되, 흐름을 설계하는 사람.
지금 나는 하루에 수십 개의 도면과 디자인,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요청에 맞춰 프레젠테이션을 새로 편집하고, 매일 밤 자정을 넘기며 모델을 조정한다. 하지만 그 무엇도 ‘프로젝트를 이끌었다’고 불리진 않는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이 공백을 나의 영역으로 바꿀 수 있을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 질문을 던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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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길 원하는가
그것은 커리어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대형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선 설계력 외에도 조율력과 비즈니스 감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것이 ‘영역을 넓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건축가로서, 나는 스케치를 한다. 모델을 만든다. 발표자료를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람들과 전략을 이야기하고 싶다. AI 시대의 건축, 기술이 건드리지 못하는 ‘공감’의 설계, 그리고 설계자에서 운영자로, 나아가 창업자로 가는 내 개인적인 여정까지.
PM의 경험은 그 모든 것을 설계의 틀 안에서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술과 예산과 클라이언트와 팀을 동시에 엮으며 굴리는 사람. 그것이 가능할 때, 나는 더 이상 건축가에 머물지 않고, ‘플랫폼 설계자’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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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점에 서다
곧 이곳에서 4년 차가 된다. 공부와 실무를 합치면 13년이 훌쩍 넘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회사가 흔들리는 시기다. 모두가 부담을 안고 있고, 책임은 디렉터들에게도 위로도 미뤄지고 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더 많은 일을 떠맡고 있고, 주어진 직무는 초과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기회다. 회사의 피로감이 깊어지는 시기, 소리를 내지 않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중요해지는 법이다. 나는 이제, 팀 내에서 구조와 흐름을 잡는 사람으로 다시 발돋움할 준비를 해보려 한다.
“너를 고용한 이유는, 네가 잘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 말속의 가능성을 나는 안다. 따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흐름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첫걸음일 것이다.
이제,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무도 그것을 정식으로 임명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백을 기회로 만든 사람은 결국, 시스템이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