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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껍데기 속, 친정엄마의 삶

3부. 서툰 우리, 그래도 함께

by 윰글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퇴근 시간쯤 울리는 이런 전화는 대개 친정엄마에게서 온다. 개별 벨소리를 다르게 설정해 두어서, 번호를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전화했는지 알 수 있다.

“엄마, 왜요?”

“너희 집에 김치 다 떨어졌을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그래요.”

김치가 떨어질 때면 어김없이 알아채시는 엄마. 총각김치를 담아두셨으니, 퇴근길에 가져가라는 연락이었다.

엄마는 올해 연세 83세, 내 나이 56세.

“엄마, 오늘 ~좀 해주세요.”

그런 부탁을 어김없이 하는 사람이 나다. 언제 철이 들지 싶다가도, 엄마 옆에만 가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며 농땡이를 친다.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 그래야지.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연세에도 몸을 움직이시는 엄마. 밥상을 차리고, 내 발을 주물러 주신다. 누가 보면 ‘저 딸, 이상하네’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엄마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김장 김치도, 나물도 무칠 줄 모른다. 명절 차례상을 차릴 때마다 엄마에게 묻는다.

“생선은 어디에 놔야 해요?”

나의 이 말에 한 치의 귀찮음도 없이 답해 주시는 엄마. 참 신기하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엄마를 보냈다.”

이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중학교 선생님이 하신 이 말씀은 그 순간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정말 그런 것 같아’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딱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엄마가 중학생 시절의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왜 그러셨을까.

그 시절 나는 엄마의 말씀에 수긍이 가지 않으면 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는 “바람이에요”라며 변명했다. 그래도 엄마가 무섭기는 했던 모양이다. 음악을 천장까지 울릴 정도로 틀며 분을 풀었다.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폭풍 같은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불똥을 왜 하필 엄마에게 뿌렸는지.


나도 딸을 둘 낳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출산 전에는 몰랐다. 아니, 키우는 건 둘째 치고, 낳는 것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엄마도 저를 이렇게 힘들게 낳으셨나요?”

아이를 낳고서 엄마에게 했던 질문이다. 대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육아는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에 욕심을 부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또다시 내려놓음을 반복하며, 나도 조금씩 엄마가 되어갔다.

이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문득문득 ‘친정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 진짜 힘들었겠다.’


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엄마도 내가 어릴 때 나와 같은 마음이 드셨을까’ 하고 생각했다.

“겪어봐야 안다.”

엄마는, 엄마가 되어야만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친정엄마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을 보며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밤늦은 시간 혼자 뒤돌아 눈물짓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일까지 하시는데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만 왜 이렇게 힘들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다들 잠든 사이, 나도 서러움과 미움, 허탈함 속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아이 둘을 키우는 나도 이 정도인데, 네 아이의 엄마이자 경제적 책임까지 짊어져야 했던 엄마는 오죽했을까.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우리 오늘 여기 가볼까?”

엄마의 제안에 따라, 친정 오빠와 나, 세 사람은 엄마가 신혼을 시작했던 감천문화마을로 향했다. 그곳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이 삶의 터전을 꾸렸던 곳이다. 지금은 ‘색채가 풍부한 산동네 골목길’로 유명하지만, 그 시절엔 가파른 비탈에 판잣집과 부속 자재로 지은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마을이었다. 엄마는 그중에서도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신혼살림. 강원도에서 태어난 엄마에게 지인 한 명 없는 부산은 쉽지 않은 땅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살던 집이 아직 그대로 있을까? 한번 찾아보고 싶다.”

골목골목 사람들에게 물으며,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추억하고 싶어 하셨던 엄마. 오빠와 나도 골목을 돌며 함께 찾아드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가 예전에 알던 할머니가 아직도 그 동네에 살아 계셨다.

“안녕하세요.”

“저 00 엄마예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 한 칸에 할머니 혼자 사시는 듯했다. 왼쪽에는 방, 오른쪽에는 주방이 있고, 천장이 낮아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오랫동안 사용한 듯한 이불 한 채를 내어주시며 ‘이거 덮어봐’라고 하셨다. 나는 그분이 우리 할머니처럼 느껴져, 당장이라도 이불 한 채를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머나, 어머나.”

“맞아. 그랬었지.”

할머니와 30분 정도 예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엄마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봉투에 용돈을 담아 할머니께 드렸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20대 초반에 결혼하신 엄마. 어린 나이에 타향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할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그 시절의 엄마 모습. 예전의 엄마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었다.

아빠는 예민하고, 20여 년 동안 몸이 아프셨다. 그래서 엄마가 경제적인 부분을 포함해 가정일 대부분을 도맡아 보살피셨다. 아이는 넷.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살얼음판 같은 평생을 살아오신 엄마. 조부모님에게는 작고 여린 막내딸이었지만, 엄마로서는 억척스러웠다.

“너희 넷이 한 방에 누워있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았어.”

우리 네 남매 중 아무도 결혼하지 않았던 시절을 회상하시던 엄마의 말씀이다. 50대 중반에 돌아가신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하시면서도, ‘너희 네 명은 큰 말썽 없이 컸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매 순간 가슴 졸였을 것이고, 힘에 부쳤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조금이라도 수긍이 가지 않으면 엄마에게 독설을 내뿜기도 한다.

‘내가 또 그랬어.’

후회는 빠르지만,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나는 아직도 아이다. 엄마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이 한마디일 텐데.

“감사합니다.”




‘소라껍데기’

자식에게 속살을 다 내어주면, 엄마는 빈 소라껍데기가 된다는 엄마의 말씀이다. 공감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식을 위해 온 평생을 바친 엄마에게, 나는 아직도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그런 자식에게도 늘 포근한 엄마. 분명 우리 엄마도 초보 엄마로 시작했을 텐데, 왜 나는 아직도 엄마를 못살게 구는 걸까.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짐했던 내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불공평해.’

이런 불만으로 더 까칠했던 나. 엄마는 자식에게 늘 공격당하고, 또 사과하는 존재일까. 나 역시 내 딸에게 끊임없이 ‘미안해’라고 말한다. 원하지 않아도 태어나게 한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자식의 이기심 때문일까.

이제는 안다. 엄마의 사랑은 자식에게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과정인 것을.

“건강하세요.”

지금 내가 엄마에게 바라는 건 단 한 가지다. 이런저런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는 큰딸이지만, 엄마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에는 욕심을 부린다.


“엄마, 맛있는 거 드셔야 힘이 나죠”

아픈 내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이런 말을 건네는 두 딸. 동생의 아침을 챙기는 큰아이, 설거지통의 그릇을 보며 내가 한숨지을 때 ‘제가 할게요’라며 달려와 그릇을 씻는 둘째, 손을 잡고 다니는 둘. 어느 하나도 나에게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미소 짓는 나를 바라보며, 내 딸들의 마음도 부디 편안하기를 바란다.


자식이 바라는 건 ‘부모의 행복’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 역시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이 그렇다. 무뚝뚝한 큰딸이지만, 엄마 사랑은 오늘도 내 안에서 대물림된다. 아이의 밥을 챙기고, 하루 종일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며, 친정엄마를 떠올린다.


“엄마, 고생 많으셨어요.”

“사랑합니다.”

“엄마는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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