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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친함'은 무엇일까?

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운다

by 윰글

마주 보며 밥을 먹고, 함께 길을 걷는다. 같이 마실 커피를 내리거나 주문하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진다. 어떤 말을 해도 그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문득 떠오르면 망설임 없이 문자나 전화를 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달려 나간다. 상대가 똑같아도, 전혀 무례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보낸 전화나 문자에 답이 바로 오지 않아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든다. ‘혹시 내 연락을 피하는 걸까?’라는 의심은 사치다.

적어도 내게 ‘친하다’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내향성이 강했다. 어색한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일이 불편했다. 식사 전부터 손과 마음이 떨리고,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내향적인 성격을 바꿔야지.’

그 마음 하나로 나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서고, 모르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TV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그들의 표현을 따라 했고, 책 속에서 마음에 닿는 문장을 만나면, 작은 목소리로 따라 읽곤 했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를 쌓아가다 보니 어느새 달라진 내가 보였다.

스무 살이 넘고부터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었다. 내 감정을 편하게 표현하고, 진심을 담아 친근함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완벽한 변화란 없나 보다. 요즘도 불현듯, 어린 시절의 내향적인 내가 얼굴을 내민다. 그렇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다. 그럴 때면 혼자 글을 쓰거나, 생각에 잠긴다. 신기한 것은, 그런 내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모습이 한 가지뿐이라면, 그 또한 재미없을 것이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몇 명이예요?”

“글쎄, 다 세어본 건 아닌데. 왜?”

둘째 아이의 평범한 질문이 내 마음을 멈춰 세웠다.

나는 누구와 정말 ‘친한 사이’일까. 대체 어느 정도의 관계를 ‘친하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은 결국 ‘나와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는 듯하다.

직장 생활 초창기에는 사람을 ‘옳다’ 혹은 ‘그르다’로 판단하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사람은 옳고 그름으로 재단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세상에는 저와 안 맞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한 후배가 직장에서 누군가와 갈등을 겪은 뒤 내게 한 말이다.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때의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그녀는 담담했다. 그 모습을 보며 ‘후배가 참 현명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지 않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와 나,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보다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릴 적엔 사람을 쉽게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던 내가, 이제는 굳이 친하지 않은 사람과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으려 한다. 그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자연스레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와 내가 불편한 사이라는 걸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다는 걸 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어 배운 인간관계의 균형이다. 불편한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순간, 또 다른 불편함이 시작되니까.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 생각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섣불리 누군가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마음을 고요히 다잡으면, 내가 먼저 편안해진다. 결국 중요한 건 오만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덕분일까. 요즘은 ‘진짜 친하다’라고 느끼는 사람의 수가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 대신 대부분 사람과는 그저 무던히 지내려 한다. 그러기 위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줄이고, 나를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의 결을 다듬으며 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개인적인 일을 굳이 알릴 필요가 있을까?’

‘내 이야기를 남들이 이렇게까지 궁금해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말의 수위가 저절로 조절된다. 감정의 표현은 한결 조심스러워졌고, 화낼 일도, 미워할 일도, 지나치게 좋아할 일도 줄었다. 그만큼 마음의 평온이 늘었다.

직장에서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낸다. 그 거리 속에서 관계의 온도는 안정된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그 관계가 꼭 더 깊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주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나의 말과 행동은 적절한가?’

교직 첫해에는 인간관계의 수위를 조절하는 일이 어려웠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 그래서 서점에 들러 인간관계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곤 했다. 그렇게 내 마음에 깊이 새긴 한 문장이 있다.

‘정도(正道), 바른길을 걷자.’

크게 어긋나지 않게, 내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게.


내 마음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방’들 중 한 곳으로 들어온다. 이건 서열이 아니라 ‘관계의 결(結)’이다. 나는 그 결에 맞춰 대화의 톤을 조절하고, 마음의 문을 여닫는다. 그 과정을 통해 상대를 비추며 나를 돌아보고, 그들에게서 배울 점을 내 안에 담는다.

가끔 누군가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혹시 나도 저럴 때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다시 나를 고쳐본다.




‘만남은 소비적인 일?’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람과의 만남은 나와 내 글을 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색으로 살아가며,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 차이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변화한다. 때로는 닮아서 끌리고, 때로는 달라서 가까워진다.

나에게 ‘진짜 친함’이란, 그런 다름을 품은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이해와 존중의 감정이다.


오늘 저녁, 세 명과 함께한 식사 자리. 같은 공간에서 1년을 함께했지만, 그동안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건 마음의 온도다. 함께한 시간의 길이보다, 상대방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가 ‘친한 정도’를 가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온기,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친함’이 피어나는 때가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을 아낀다. 그리고 그 말에 마음을 담는다.

아주 짧게, 그러나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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