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운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오늘은 내가 아끼는 후배 두 명을 만나는 날이다. 오랜만의 약속이라 그런지, 마음이 괜히 설렘으로 가득 찼다. 우리가 마주 앉기로 한 곳은 광안리 해변의 한 식당이다. 바다 냄새가 스며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은 모른 채, 길은 야속하게도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평소 같으면 30분이면 닿을 거리인데, 벌써 40분째 운전 중이다. 답답한 도로 위에서 마음만 앞서 동동거린다.
“차가 좀 밀리네요. 2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짧은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만나기도 전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우리 셋의 인연은 8년 전, 같은 학교에서 시작됐다. K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고, B는 한 학년 위였다. 그래도 우리는 같은 학년 군에 속해 있었기에,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뒤 함께 차를 마시며 마음을 나눴다. 그때의 대화는 업무 이야기를 훌쩍 넘어섰다. 교직의 고단함, 그 안에 숨어 있던 기쁨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까지.
“선생님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네, 맞습니다. 사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어느 교장선생님이 회의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조금 어색하게 들렸다. 특히 공적인 자리에서 던져진 말이었기에, 더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교직에 몸담은 지 30년이 가까워진 지금, 그 말이 얼마나 깊은 뜻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공적인 일을 잘하려면, 사적인 삶이 편안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사적인 우리의 관계는, 업무 너머에서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 인연 덕분에 우리는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이어갈 수 있었고, 당시 학교생활을 무던히 견디는 힘이 되기도 했다.
“나는 직장에서 만났어도, 개인적인 만남이 가능해야 그 인연이 오래 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일부러 ‘개인적인 시간을 함께 보내자’라고 제안하곤 한다. 물론 이런 만남은 어느 정도의 친숙함이 쌓여야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만남은 설렘 그 자체였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맨 끝 방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미소로 나를 맞이하는 두 후배.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친근했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모든 모임이 끌리는 건 아니다. 어떤 날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고 싶을 때도 있다. 물론 막상 나가면 즐겁게 시간을 보내지만—한마디로 ‘양념 반, 프라이드 반’ 같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두 사람이 보고 싶었다.
“저는 결혼할 마음이 없어요.”
“왜? 결혼하면 좋을 텐데…”
이렇게 말하던 K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 날짜 잡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이어 첫 아이, 그리고 둘째까지 생겼다.
“저, 셋째 가졌어요.”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로 친해지듯, 여자들에겐 ‘출산 이야기’가 공감의 버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육아 이야기가 시작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남편 험담(?)’. 주부들만의 은밀한 공감 코드다. 물론 결국엔 남편 자랑으로 마무리되지만.
B는 미혼이다. 그래서 이런 결혼 이야기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배려’는 소통의 윤활유다. 그렇게 우리 셋은 수다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첫 만남’
내가 D 초등학교에 부임했을 때, K는 이미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셋은 그해 첫 ‘교직원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엔 어색해서 서로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의 ‘무던함’은 ‘어색함’을 녹여낸다. 경주 휴게소에서 마신 커피 한 잔, 그 따뜻함에 마음이 풀렸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겠다.’
사람이 친해지는 계기는 대개 사소하다. 작은 친절, 공통된 취미나 이야기 소재, 비밀의 공유, 함께 웃은 순간.
그래서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먼저 그 사람을 관찰한다. 그리고 나와 연결될 수 있는 ‘친밀 버튼’을 찾아 그 지점을 중심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내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려 한다. 결국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투명함이다.
‘나는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상대에게 나를 선택할 여유를 건넨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인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계를 향한 진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흐르면 관계마다 고유한 색이 생긴다. 나는 그 색을, 상대와의 교류 속에서 천천히 다듬어간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일반 주택을 개조한 카페를 찾았다. 1층에서 차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음료가 나오기 전에 2층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할지 망설일 틈도 없이, 그동안의 일상들이 톡톡 터져 나왔다. 오래도록 소통하는 사람 사이엔 끈적임이 있다. 진하게 연결된 듯한 마음의 접착제.
우리 셋이 나눌 ‘이야기 주머니’는 덜어내도 다시 채워지는 ‘흥부네 쌀독’ 같다. 할 말이 왜 그리 많은 걸까. 오랜만인데도, 마치 어제 헤어졌던 사람처럼 수다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같이 한 추억이 많은 사람은 쉽게 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사이에는 마음으로 엮인 추억이 많았다. 덕분에 우리 셋은 앞으로도 함께 인생의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끌리는 사람은 만나면 된다.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상대와 마음이 통하면,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하나의 생명체처럼 살아난다.
오늘 나는 ‘인연의 온도’를 느끼며, 내 마음의 단단함을 녹여보았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