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여섯 개 들이 생수병에 달린 끈을 한 손으로 오래 잡고 보면 손바닥이 벌게진다. 허옇게 피가 안 통한 자국만 일자로 난다.
쥐가 난 다리는 다리가 아니라 대리석으로 만든 다리 같다. 땅을 밟는다는 감각도 둔해서 다리가 중심을 잡을 수도 없다. 갓 태어나 처음 걷기를 시도하는 사슴 다리처럼 비틀거린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이상하다.
체조를 하느라고 목을 돌리면 우두둑하는 소리가 목이며 관절을 울린다. 행여 몸 밖으로 나간 소리를 누가 들으면 어쩌나 하고 주위를 돌아본다. 조용한 곳에선 땀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총소리처럼 크게 들리니까.
접힌 오금 사이로 딱딱한 나무 의자가 만져질 때, 온몸에 자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이 되살아나곤 한다. 하필이면 양말 안쪽의 발뒤꿈치가 근지럽고 손으로 닿을 수 없는 등 한가운데가 간지럽다. 매일 씻어도 간지러움은 늘 곤란한 데서만 난다.
삽으로 땅을 팔 때는 의외로 허리를 잘 써야 한다는 조언을 나는 한동안 체득하지 못했다. 내 삽질은 느렸고, 중대장은 또 실망했다. 구박받지 않으려면 자세를 갖춰야 했고, 나는 팔을 사용하고 허리를 숙이는 대신, 허리를 적당히 기울였다 폈다 하면서 힘을 주는 방식을 체득했다. 그다음부터 구박은 받지 않았다. 생각보다 유용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굳이 배우고 싶은 기술은 아니었다.
박수 소리가 크게 나는 박수는 손바닥을 한껏 벌린 채로 치는 박수가 아니다. 엄지를 적당히 손바닥 안쪽으로 구부리면, 엄지 밑에 있는 도톰한 살이 한껏 올라온다. 큰 박수 소리는 그 상태에서 손바닥을 서로 엇갈린 채 맞대면서 치면 나왔다. 마치 한쪽 손바닥 안에 큰 백합 조개가 든 것처럼 공간을 비워두며 박수를 치는 게 핵심이었다.
내 상체만 한 상자 더미를 들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큰 근육을 쓰는 것이다. 두 팔로 든 상자에 반동을 주고 그 반동하는 틈을 타서 배꼽 근처에 상자를 올려서 허리에 상자를 기대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요컨대 큰 상자의 무게는 팔의 힘이 아니라 허리의 힘으로 지탱하는 것이다.
쿵후[功夫]라는 말은 원래 시간을 뜻하는 말의 중국어라는 것을 중국어 선생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의 의미엔 공부의 의미도, 무술의 의미도 깃들게 되었다고 들었다. 선생님의 말이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잠을 깨우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튼 그 이야기를 생각보다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속는 셈 치고 그 말에 따르면 시간을 들여야 공부든 쿵후를 배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프랑스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나는 나의 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영혼과 육체로 나뉘지 않는 몸 그 자체를 강조한 그이의 생각이 나로 하여금 몸이 주는 신호와 몸의 근원을 산책하듯이 되짚어보게 한다. 그의 말은 몸에 관한 내 북극성이다.
내 경험이 모두 정답은 아니기에 맞다고 우길 수도 없다. 우긴다고 무술을 터득할 리가 없듯이, 우긴다고 인생을 터득할 리가 없다.
독수리 타법을 즐겨 썼던 예전의 나는 한 문장 치는데 거의 1분이 걸렸다. 이제는 키보드를 보지 않고 한 페이지 글 쓰는 일을 곧잘 해낼 수 있다. 다 했다고 생각할 즈음에 더 해서 그나마 이만큼 왔다.
더 잘해서 두 사람 몫은 해야 하는데 싶을 때가 있다. 무술가가 아닌 내게는 그게 경고 신호다. 무리하면 뭣도 안된다.
컴퓨터를 끄고, 잠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다. 정오의 태양이 아직 도로를 달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