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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글씨, 그리고 나

8월 5일

by GIMIN

캘리그래피를 취미삼아 하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봤다. 한 획을 긋느라 볼펜을 오래도록 종이에 닿게 만들면서도 거침없이 쓰는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캘리그래피가 아니라 필기구에 좀 더 마음을 쓰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악필이기 때문에 만년필, 잉크 같은 것에 더 연연하는지도 모르겠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제브라 펜과 둥근 펜 그리고 G 펜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적이 있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그린 건 아니었지만, 펜은 역시나 내 손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무광의 제브라 펜은 얼룩덜룩해졌고, 둥근 펜은 찌꺼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제멋에 겨운 채 촉이 비틀린 G 펜은 영영 멀쩡한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파이로트 제도용 잉크는 점점 수분을 잃었다. 만화 동아리를 탈퇴한 게 그 즈음이었다. 만화 원고지나 델리타 스크린 톤을 사러 마포까지 갔던 고생은 말 그대로 생고생(?)이 되었다.


노트를 가지고 오지 못해 대학교 교재에 대고 필기를 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이 내 책을 가만히 보시더니 이내 딴청을 피우셨다.


기말고사가 끝날 즈음에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교수님은 내 필기가 너무 망가졌다면서 나한테만 따로 과제를 내셨다.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의 한자에 한국어 토까지 달아가며 쓴 기억은 지금도 씁쓸하다. 과제를 받은 교수님은 밝은 표정으로 어깨를 쓰다듬었고, 나는 다시 예전에 내가 쓰던 그 글씨체로 순식간에 복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토샵을 비롯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자간을 좁힐수록 괜찮아지는 글자에 환호했다. 비트맵 이미지로 ‘깨트린’ 글자를 이리저리 배치하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었다. 키보드 단축키를 외우는 고생은 고생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다시 글씨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 즈음이었다.


취미삼아 서예를 하기 위해 붓을 든 적이 있다. 팔뚝 안에 십 년의 세월이 들고 손에 수만 개의 글씨를 섭렵해야 글씨를 쓴다고 했던 옛 어른들의 말씀은 과연 지당했다. 나는 앙상함과 떨림으로 가득한 글씨가 창피했다. 한석봉까진 바라지도 않았던 나는 돌아오는 길에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서예가 글씨와 글씨 이외의 여백도 즐기는 것이라면 혁필화는 현란한 색감과 기발한 상상으로 사람 마음을 들뜨게 한다. 남대문 밑에서 본 혁필가의 혁필화를 아직도 기억한다. 낚시 의자에 앉아 쭈그려 앉은 채로 졸던 그의 옆에서 외국인이 신기하다는 듯이 그림을 들여다봤다.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라니.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핑계와 변함없는 물욕에 애꿎은 혀만 들입다 차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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