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X-94-30
어쩌면 그이의 작업은 눈물이 담뿍 젖은 붓으로 빈 캔버스에 한없이 슬픔을 덧칠하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늘 자신의 슬픔에서 깊은 표현을 길어 올렸던 그이의 작업은 이 앨범에 이르러 결코 잊히지 않을 초상(이자 내면의 풍경)화를 그렸다.
이 앨범에 들어간 모든 소리는 말 그대로 사무치다. 정말이지 깊숙한 우울 속에 한껏 몰입한 이 앨범은 그이의 깊은 ‘몰입’이 (거대한 설득력에 힘입어서) 너른 밀물이 되어 청자의 가슴속에 계속 밀려든다. 이 ‘몰입’은 김민규(a.k.a 스위트피)가 만든 「듄」을 단순한 몽상으로 들리지 않게 했고, 신대철이 만든 「Fortune teller」를 (트립 합[Trip Hop]의 요소를 더한) 단순한 재즈곡에 머무르지 않게 했다. 이소라의 기민한 보컬은 이 앨범에서 가장 얌전한 성격의 곡인 「봄」에 깊고도 깊은 ‘존재의 허무’를 천천히 도포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성과’는 조규찬의 (완벽에 가까운) 보컬 편곡과 디렉팅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지구 저편에 떨어진 핀 하나만큼의 슬픔에도 세심하게 반응하는 이소라의 예민한 감성이 아니었던들 불가능했으리라.
(그이의 데뷔작이었던 『낯선 사람들』[1992]에서부터 시도했던) 그이의 작사(作詞) 또한 이 앨범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앨범의 언어는 곡의 감정과 완벽하게 조응한다. 「바람이 분다」의 비극적인 시간을 단문으로 곱씹는 듯한 그이의 가사는 단호하면 단호할수록 역설적으로 슬픔이 짙어만 가는 독특한 미감의 경지를 이룩했다. 「별」을 수놓은 (두운과 각운과 음절수까지 멋지게 조절한) 그이의 가사는 해당 노래에 선명한 서정과 고풍스러운 품격을 부여했다.
「Tears」의 ‘허무’와 「Midnight Blue」의 ‘이별’에서 촉발한 (이소라가 소환한) 이 ‘슬픔의 바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는 에필로그 바로 앞까지 일렁거린다. 이 앨범의 곡을 제공한 작곡가들은 자신의 지류에서 벗어난 물을 조심스레 이 깊은 바다에 보탰다. 이 가운데엔 김민규가 만든 「별」이나 「듄」처럼 작곡가의 특징이 잘 드러난 곡도 있었고, 이한철의 「아로새기다」처럼 해당 작곡가가 즐겨 쓰던 음악적 특징을 벗어난 곡도 있었다. 이소라는 이들 모두를 깊이 받아들이며 자신의 바다에 풀었다. (전위적인 성격을 지닌 정재형 작곡의 「siren」 또한 이 거대한 ‘바다’에 무람없이 흘러들었다.) 노래와 깊이 조응한 가사를 방향키 삼아 이소라의 목소리는 유유히 항해했다. 해류를 거스르지도 않으면서, 어찌나 수월히 항해하는지, 이 앨범에 참여한 작곡가들의 곡마다 세션을 달리 기용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을 정도다.
(이한철의 또 다른 걸작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부르는 이소라의 보컬은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부르려는 그이의 목소리로 인해 이 앨범을 결국 슬픔의 바다를 벗어나 삶이라는 뭍에 닻을 내렸다.
이 앨범의 와중(渦中)을 담당하는 「이제 그만」에서 이소라는 애증과 체념을 오가는 감정을 뭉뚱그리는 발성으로 표현했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도 끝내 인간의 숨을 움켜쥐려 한 이소라의 목소리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을 조심스레 일깨운다. 우리는 결국 사랑이 필요하다고. 아프고 비참한 결말이 우리를 기다려도 우리는 결국 한 사랑을 통과해야 다른 한 사람에게 닿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