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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과 엽전들』(1974)

PART 9. 35-8-3

by GIMIN

(누차 이야기했지만,) 신중현은 흔히 ‘한국 록의 대부(代父)’라 불리고, 나 역시도 그 칭호에 동감하지만, 그의 전성기 음악은 생각보다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함유했다. 그의 록 음악은 록이 흑인음악에서 왔다는 사실을 신묘한 방식으로 ‘정확히’ 체득한 록 음악이었다.


이 앨범엔 하드 록과 사이키델릭 록과 흑인음악(특히 소울)이 골고루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긴긴 밤」의 그루브를 표현하는 기타 연주나, 「그 누가 있었나봐」 초반부에 등장하는 훵크 기타 연주가 바로 그 ‘증거’들 중 하나다. 연주곡인 「떠오르는 태양」의 중간 부분에서 이남이의 베이스 연주와 권용남의 드럼 연주는 스윙감(!)을 갖춘 연주를 슬며시 구사했다. 신중현의 퍼즈 톤 기타 애드리브 연주와 더불어 넘실대는 이 ‘스윙감’은 곡의 후반부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남이는 신중현의 기타를 충실히 보좌하면서도 나름의 역량을 드러내는 절묘한 베이스 연주로 이 앨범의 사운드를 지탱했다. 기존에 만든 신중현의 음악이 추구했던 사운드의 연장선에 있던 「저 여인」에서도 그의 베이스 연주는 빛났다. 「생각해」의 중저음을 확실하게 잡는 대목에서도, 「그 누가 있었나봐」에서 권용남의 까다로운 드럼 연주와 신중현의 샤우팅 섞은 보컬 사이에서도 충실히 제 몫을 해내는 그의 베이스 연주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권용남 또한 단순히 ‘반주’에 충실하지 않고, 「할말도 없지만」의 묵직한 드럼 연주와 「설레임」의 섬세한 드럼 연주까지 모두 소화했다.


(신중현이 자신의 60년대 음악에 즐겨 사용했던) 현악 사운드나, (키보드를 비롯한) 건반 악기 사운드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세 사람의 (모든 악기에 리버브를 건) 연주와 노래(그리고 ‘잡담’)만들어간 이 앨범의 (소위) ‘일반 반’의 연주를 내가 옹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곡과 그의 보컬(과 다른 멤버들의 기가 막힌 연주 실력)은 이 버전의 사운드로만 그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미인」의 (하드록의) 강력한 벌스(Verse)와 (그루브가 첨가된) 이완된 훅의 선명한 질감은 이 버전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할말도 없지만」의 호쾌한 퍼즈톤 기타 연주에 호응하는 신중현의 쩡쩡한 보컬은 이 ‘일반 반’이 그의 보컬 커리어 하이라는 점 또한 분명히 했다. 물론 초판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재치’가 넘치는 잡담이 들어간) 「나는 몰라」 같은 곡도 있었지만, 독특한 가사 솜씨와 그루브 넘치는 세션이 일품인 「긴긴 밤」과, 이들의 연주곡 걸작 중 하나인 「떠오르는 태양」은 오로지 ‘일반 반’에만 존재하는 곡이었다. 어찌 들으면 가락 같고 어찌 들으면 록 같은 이 ‘일반 반’의 오묘한 (툭툭 구성진) 표현 또한 초판의 능글맞은 사운드보다 더 합당하게 들린다. 이 앨범에서 신중현 사운드는 그 정체(正體)를 드러냈다. 우리 음계를 사용하면서 록에 대한 대중의 위화감을 없애려 노력한 (그렇기에 「나는 너를 사랑해」 또한 이 앨범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송라이팅 또한 이 앨범에서 만개했다.


정말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일갈하는 듯한 이 앨범의 사운드는 그 자체로도 신중현의 새로운 출사표라 부를 수 있는 ‘기백’이 깃들었다. 이 앨범은 당국의 ‘금지 조치’ 이전까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고, 신중현은 그제야 자신의 음악을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 앨범이 뿌리내린 자리 위로 얼마나 많은 나무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혔고, 얼마나 많은 숲이 일어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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