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억에 대한 오해/습지에서 만난 목소리 II

by 봄날의 북극 Mar 25. 2025

따스한 온기를 지닌 그녀의 손은 거짓말처럼 너를 이끌고 있어. 늪은 다시 소란한 생명의 소리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늪의 소리인지 그녀를 만난 흥분이 가져온 설렘인지 알 수는 없었어.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차가운 늪의 진흙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던 너의 존재가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지. 마치 심연으로 가라앉던 돌멩이가 물결을 타고 되돌아오는 것처럼, 네 몸을 옭아매던 무거운 공포가 조금씩 풀려나가는 듯했어. 그러나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었지. 몸속의 공기가 빠져나가고, 폐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너를 붙잡고 있었어. 그 순간, 아주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음(音) 있었어. 그것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 너를 불러내는 듯한 익숙한 울림이었지. 처음에는 미세하게 떨리는 바람처럼 작았으나 점점 더 선명해졌어.

확고한 하나의 음(音)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습지를 가로질러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고 했어. 가보지 못한 숲의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추기 전 성이듯 잠시 머무는 듯했지만, 작은 기척마저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 "이제는 끝이야"라고 경고했던 목소리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듯, 하나의 음(音) 깊은 숲 속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찾을 수 없는 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다행히 그녀의 따스한 손이 여전히 내게 느껴지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어. 너는 그녀를 보았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전하는 감정을 느낄 수는 있었어. 그것은 애절한 호소였고, 확신이었어. 그녀는 결코 너를 놓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였지.


그러나 그녀가 대여섯 걸음 앞서가기 전 그녀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그날. 그렇게 확고한 의지를 담아 나를 앞서가던 그녀의 뒷모습에 주춤했던 그날. 기시감처럼 그날이, 그녀의 손을 잡는 그 순간에 떠올랐어. 그 순간이 의 오해에서 비롯된 기억이지 않았을까를 두려 하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어. 그녀의 손을 놓친 너는 멈추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어. 어찌해야 될지 몰라 너는 그날의 기억처럼 주춤주춤 그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어. 그때 바람이 불어왔지만 이제는 마음의 흔적도, 햇살의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또다시 별이 뜰까 걱정스러웠지만 지금 네가 걱정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알아야 될 텐데.


저 멀리 습지의 가장자리에서 괭이부리갈매기가 날개를 펼쳤어. 먹이를 발견한 듯  낚아채려 내려앉았다가 매섭게 비상하며 날아가고 있어. 그 새가 날아 간 자리, 하늘이라 믿었던 그곳에 희미한 햇살의 흔적이 남아  있었어. 멈춰버린 듯 보였던 시간이 더디지만 천천히 흘러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

시간의 속도라는 것이  저 새들의 속도만큼일까 생각해 보지만 시간은 제각각 흘러가고 있음을 이미 너는 알고 있어.


늪은 언제가 끝이 나겠지만 너의 시간 속에서 너는 영원히 머물 것만 같았어. 주춤주춤 망설임 속에서 늪이 끝나도 네 발은 여전히 진흙에 묶여 꼼짝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지.


손을 놓친 그녀가 지금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어. 머리 위, 하늘이라 믿었던 공간은 어느새 잿빛으로 바래 더 이상 햇살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


하나의 음(音)이 사라지기 전 서성이듯 멈칫하던 그 순간에 시간이 어긋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어. "이제는 끝이야"라고 말했던 목소리를 따라 하나의 음(音) 너에게 경고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되었어. 하지만 늘 그렇듯 늦어버린 시간에 때를 놓친 깨달음이라는 것을 너는 알아차렸어야 했어.


시간의 속도가 달라서 매번 너는 과거에서 도착하지 못한 내일의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만 했는데. 너를 대여섯 걸음 앞서가는 그녀의 시간과 주춤주춤 망설이는 너의 시간의 속도 차이로 그녀와 너의 틈은 메꿀 수 없는 깊은 골로 변해버렸어. 도달하지 못한 내일의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너는,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어쩌면 그 틈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지나는 길 위에 이미 존재했던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간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너는 깨닫고 있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이번에도 그 말과 함께 뒤돌아 섰어. 잿빛하늘은 점점이 내려앉아 숲 속의 색감마저 뺏어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잿빛으로 생기를 잃었어. 색(色)을 잃은 숲은 더 이상 소란한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어.


"어쩔 수 없지"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 선 후 그녀가 걸어오는 동안 그녀만이 유일한 색(色)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멋지게 흩날리자 바람은 질감 좋은 머릿결을 쓰다듬고 있어.

바람에는 잃어버린 마음의 흔적이 미약하게 느껴졌지만 색감을 잃어버린 지금의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하고 의미가 상실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그러한 너의 느낌이 현실적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


걸어오는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녀의 눈빛에 애정 어린 관심이 느껴지는 것을 너는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어. 내일의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는 데 확고한 그녀의 의지가 담긴 걸음은 단번에 너와의 거리를 좁히고 네 앞에 섰어. 그리고 다시 한번 너의 손을 잡은 그녀는 가만히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어. 시간의 속도 차이로 언제나 그녀의 뒤에서 주춤주춤 하기만 했던 너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너는...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이정표를 눈여겨 살펴보아야 했었어. 습지에 다다르던 그 순간에도 아직 늦지 않았지만 너는 괭이부리갈매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늪이 있는 숲 속으로 들어오고 말았어."


"그렇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몰라."


"너는 필연적으로 늪을 지나 진흙에 빠져 두려움을 느끼는 그 순간이어야만 음(音)을 들을 수 있는지도 몰라."

"하나의 음(音)이라고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것은, 시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었어."


"그 음(音) 위해서는 그러한 순간들을 견뎌 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러한 순간들이 너를 피폐하게 만들 것 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네가 떠나온 곳의 우리는 그러한 것을 걱정했었어."


"우리의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너는 결국에 피폐해져 버렸어. 색(色)을 잃고 말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게 끝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


"너의 피폐는 필연적이었지만 너의 별은 여전히 저기 하늘 위에서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너의 피폐로 상실되어진 색(色)은 완결된 종식이 아님을 알아야 돼."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하나의 음(音)이 어둠의 숲으로 사라지기 전 주춤했던 서성임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한 망설임이었음 알아야 돼."


"괭이갈매기가 먹이를 낚아채 하늘로 비상하던 순간에 너에게 경고하려고 했던 것은 너의 시간 속에서 살지 말고 우리의 시간 속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는 것을 잊지 마."


"지금 이곳은 너의 시간 속에서 점점이 사라지는 과거의 어느 지점 어느 시(時)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래."


"그래야지만 너는 어쩔 수 없는 지금의 이 상황에서 온전히 벗어나 별을 찾을 수 있어."


"그러니 기억해, 오해로 인한 기억의 상실을 기억해."


"완결된 종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


"우리는, 나는 여기서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 줘."




작가의 이전글 밤 깊어 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