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눈썹과 쌍꺼풀, 깔끔하게 반짝이는 피부와 보기 좋게 마른 몸,
넓은 어깨, 다정하고 세심하며, 불의 앞에서는 결코 참지 않는 카리스마,
이 모두를 두루 가진 남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 몇 편의 글을 통해 그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을 아름답게 ‘만’ 썼다.
백 점 만점에 백 점, 아니 백이십 점짜리 아버지, 앞선 몇 편의 글‘만’ 보면 그렇다.
삼십사 년을, 아버지와 딸 관계로써 함께 산 나는 글쎄, 아버지라는 사람을,
또 그와 함께 산 지난 시간을 무작정 ‘아름답다’라고만 할 순 없다.
알기 때문이다. 아주 내밀하고 면밀하게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꽤 오랜 시간 미워했고….
사실은 지금도 마음 깊이 미워하는 나의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를 ‘낱낱이’ 적어보려 한다.
이 글은 폭로이자 고발이며, 고백이다.
일천구백오십팔 년 생, 일명 ‘오팔 년 개띠’. 띠는 개띠인데 별명은 ‘돼지’였다.
식탐 때문이다. 늘 주린 배를 안고 살아왔던 그는 유독 먹는 데에 집착했다.
눈을 뜨면 당장 그날 먹고 살 궁리부터 했던 사람,
학교 교실보단 산과 들로, 논밭으로, 냇가로 나가야 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먹고 살 만’해 진 지금도 먹는 데에 관심이 많다.
주말이면 주방이 아주 난장판이 된다. 큰 솥이 몇 개씩 나와 있고 그 솥 가득하게 요리를 한다.
한상 차려놓고서는 하는 말은 늘 똑같다. 우리 오늘 실컷 먹자.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게 산 데에는 할아버지 탓이 크다.
할아버지 젊을 때만 하더라도 ‘뒷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논, 밭이 다 우리 집안 소유였다’라고 했다.
와, TV 드라마, 그것도 아침 아홉 시 전후, KBS 1TV에서 하는 아침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대사이지 않나. 그게 우리 집안 일이었어?
그래서 그 논과 밭은 다 어디있냐, 라는 질문에는 할아버지의 취미와 취향에 대해 먼저 밝혀 적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심히 좋아하고 말았는데, 그게 바로 노름과 여자였다.
우리 집안 가훈 아닌 가훈이 ‘도박하지 말자’였던 때가 있었을 만큼,
아버지는 도박에 있어서는 아주 치를 떨곤 했다.
할아버지는 노름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했고,
2남 1녀 중 막내였던 아버지는 별안간 3남 3녀 중 셋째가 됐다.
새어머니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아버지. 그는 사랑을 갈구했다.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하지만 집안 어디에도 어린 아버지 몫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열다섯 살,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이삼 학년 즈음 됐을 나이에 사랑을 찾아,
살기 위해 지금 사는 서울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강원도 산골 소년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분투했다.
산과 들, 논과 밭, 냇가 대신 시장과 공장에서, 정말 안 해본 일이 없다 한다.
어린 시절부터 몸을 너무 괴롭힌 탓에 위와 장은 이미 다 망가졌고 관절도 시원치 않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는 또 다른 시련을 주었는데…. 다름 아닌 탈모였다.
물려줘도 좋은 것, 예를 들어 논과 밭, 집과 차, 금, 은, 현금다발 같은 유산은 하나 남겨놓지 않았으면서도 ‘머리 빠짐’의 유전자는 왜 그렇게 성실히 챙겨 넣어 주었는지. 아버지는 종종 볼멘소리를 냈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삶은 안정되지 않았다.
몸도 비실하고 돈도 없고, 그렇다 할 경력, 경험도 없고. 전문 기술이라 할 것은 더더욱 없는 남자.
그럼에도 아버지는 참 착한 사람이라 했다.
사십 년 전, 그런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여 지금까지 죽니, 사니 하며 사는 우리 어머니 하는 말이 그렇다.
돈도 없지, 머리카락도 없지. 어떻게 된 게 앞니도 하나 없고…. 나 참.
나이 차이가 한참이었잖아. 아저씨지, 아저씨. 몇 번이나 헤어지자, 했어.
근데 그때마다 꿈을 꾸는 거야. 할머니 꿈이었어. 꿈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아빠랑 연결되어 있더라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너희 아빠가 통닭을 그렇게 사 먹였어.
돈이 없으니까, 그 한 마리 나눠 먹는 게 전부였지.
통닭 때문이야, 통닭. 그걸 먹질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너희 아빠가 사람은 참 편안했어.
가식 없고 진실하고, 다정하고.
그렇게 통닭을 뜯어 먹던 두 사람은 있는 돈, 없는 돈 싹싹 긁어 작은 집을 마련했다.
월세, 반지하에 볕도 잘 들지 않는 집. 자주 이사했다.
처음보다 조금 넓은 집, 집안에 화장실이 딸린 집, 볕이 드는 집을 찾아 옮겨갔다.
형편은 아주 미세하게 나아졌다. 그 사이 식구는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났다.
새까만 얼굴에 유독 눈이 반짝반짝하던 첫째 딸, 바로 나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 나이 서른여섯 살, 어머니 나이 스물아홉 살의 일이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고, 놀아 본 사람이 잘 논다, 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된다, 라고 한다.
나는 이에 ‘거의’ 수긍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예외였다.
우리 아버지는 참 다정했다. 정이 많다. 사랑도 많다.
가끔은 참 미스터리하다, 싶다. 위 논리라면 아버지는 시작부터 크게, 아주 크게 잘못됐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랑을 받고, 받은 사랑을 차곡차곡 빠짐없이 모았어야 한다.
적금 붓듯, 부동산, 주식, 코인 투자하듯 부지런히 모았어야만 아버지의 지금이 설명된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적금이 뭐야, 투자는 무슨. 마이너스 통장부터 시작이지, 아니다.
어디 캐피탈 같은 데서 매일 곱절 씩 늘어나는 빚에 쫓겨 다니는 처지와 다름없지.
아버지 나이 마흔 살 즈음,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 받고 병원 처치를 받아야 했던 기간은 보름 남짓이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돈을 벌고, 퇴근하면 아버지를 간병했다.
때문에 그 기간동안 나는 근처에 사는 고모에게 가야 했다.
나를 그 집에 두고 나와야 했던 그날, 아버지는 하염없이 슬퍼했다 한다.
보름 후 퇴원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던 아버지,
아버지를 보자마자 엉엉 울던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슬픈 눈이 되고 만다.
아버지는 수술 후 꽤 오랫동안 집안을 지켜야 했다.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 아버지는 어린 딸의 양육을 전담했다.
그 덕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다.
매일 같이 아버지와 몸을 쓰며 논 가닥으로 지금도 몸 쓰는 데는 자신 있다.
입맛도 아버지와 꼭 닮았다.
각종 탕과 찌개, 알, 내장 류는 이미 미취학 시절부터 먹기 시작하여 지금도 즐겨 먹고 있다.
‘집밥’하면 생각나는 음식은 아버지가 직접 만든 돼지고기 김치찌개이며, 나에게는 이게 소울 푸드이다.
아버지도 그걸 안다. 그래서 줄곧, 너 나중에 결혼하면 남편되는 사람한테 이 비법을 알려줄 거야.
그래야 우리 딸 밥 해주지, 라고 한다. 물론, 그 어떤 사람도 비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빠, 미안.
아버지는 이후 크고 작은 회사에서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했다.
밤낮 없이 일만 했다. 쉬는 날도 며칠 안 됐을 텐데, 그럼에도 아버지, 또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업고,
유아차에 태워 서울 방방곡곡 나들이했다.
그중에서도 (우리 가족 사이에선 ) 꽤나 유명한 사진이 있다.
젊은 아버지와 어린 나는 작은 썰매에 겹쳐 앉아 한 곳을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머문 곳은 아마도, 카메라를 든 젊은 어머니였겠지.
어린 나는 두툼하게 잘 입고 있어 아무 문제 없었는데 정작 아버지, 어머니는 얇은 옷,
눈이 닿으면 금방 젖어버리고 말 소재의 옷을 입고 갔던 탓에, 감기 몸살로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얼마 되지 않는 쉬는 날, 그 귀한 시간을 당신 딸을 위해서만 썼다.
눈썰매장,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창덕궁, 집 근처 공원,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선
서울 전역에 있는 거의 모든 박물관과 전시관,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다.
당사자인 나는 사진으로 보고서야 ‘아, 나 여기에도 갔었구나.’ 싶은 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두 사람은 모든 힘과 시간, 마음을 아낌없이 썼다.
사실 이십 대 초중반 때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힘씀, 시간 씀과 마음 씀에 큰 감흥이 없었더랬다.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부모의 책임과 의무,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나는 주 오 일 근무에, 직업 특성 덕에 주말 이틀과 공휴일은 빠짐없이 쉰다.
쉬는 그 이틀 주말과 간간이 주어지는 공휴일은 그 어떤 사람에게조차 양보할 수 없고 빼앗길 수 없고,
그래서 나름의 계획을 세워 ‘알뜰살뜰’ 나눠 쓴다.
그런데 그 시간을 잘게 쪼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온전히 투여한다?
미혼에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심지어 나의 부모님은 주 육칠 일을 내리 일했으며 아침 일찍부터 나가 밤 늦은 시간까지 ‘몸’을 썼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나를 위해 그렇게 했다. 그리고 더 해주지 못한 데에 마음 아파한다.
또 다른 사진이 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든 나와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어린이 우산,
아버지란 사람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이다.
아버지는 긴 노동으로 지친 몸을 하고서는 새벽 시장에 가 딸 선물을 사서 귀가했다.
이미 한참 늦은 시각, 보통 아버지라면 그냥 빨리 들어와서 눕기 바빴을 텐데,
그는 당신 몸의 안락함보다 어린 딸의 웃는 얼굴이 더 중요했다.
아버지는 자는 딸 옆에 장난감을 놓아뒀다.
다음날 눈을 뜬 딸은 깜짝 놀라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뛸 듯 기뻐하며,
아니 방방 뛰며 아버지 품에 안겨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은데….
아빠, 미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인물이 못 된다.
지켜보던 어머니 말을 듣자 하니, 부스스 눈을 뜬 나는 정말 ‘뚱’ 한 얼굴을 하고서는 우산과
장난감을 슥 쳐다보곤 조금 만지작대는 게 전부였다 한다.
아버지는 굉장히 실망했고 어머니는 괜히 머쓱하고.
표현이 적은 아이였긴 했지만 그게 ‘싫다’는 아니다.
좋은 데, 정말 좋은데. 좋은 걸 말로, 얼굴로, 몸으로 온전히 다 드러내는 게 조금 쑥스러워 그랬던 것 같다.
사랑을 표현하길 좋아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데에 익숙해져, 그 사랑을 온전히 다 표현하지 못한 딸.
나와 아버지는 조금 닮은 듯, 매우 다른, 잘 맞는 듯, 맞지 않는 애매한 사이였다.
잘 맞추어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서로 닮은 구석, 잘 맞는 부분을 찾아 ‘한편’이 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당신이 쏟아내는 사랑이 컸던 만큼 그만큼의 사랑을 되돌려 받고 싶어 했다.
그의 세계에는 가족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아주 작은 거절거부, 반대에도 벼락같이 반응했고,
가끔 한 번씩 마음이 뒤틀린 때면 험한 말과 몸짓으로 아내와 어린 두 딸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냈다.
어릴 때는 세 살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덜덜 떨다 온 얼굴이 다 젖고서야,
소리가 잠잠해지고서야 잠들었고 조금 더 나이 들어서는 아버지, 어머니 양쪽을 오고 가며 엉겨 붙고
매달리며 몸부림쳤다. 제발, 그만해. 싸우지 마. 아빠가 좀 참아. 엄마가 좀 참아, 라고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분명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싸우는 데도 물리적인 힘이 더 센 아버지가, 거친 말을 하며
집기를 깨부수고, 어린 두 딸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야 마는 그가
너무 밉고 싫고, 때론 저주했다.
다른 한편으론 기도했다.
그냥 두 사람 갈라서게 해주세요, 이렇게 싸우며 살 바에는 그냥 따로 사는 게 낫겠어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싸움의 정도에 대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글쎄. 아이 입장에선 충분히 ‘공포’를 느낄 만 했다.
두 사람 다 보통 성격이 아닌 데다 분노를 분출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또 혈기 왕성했던 삼사십 대 아닌가. 여기에다 나란 사람, 나란 아이의 예민까칠섬세하고 복잡다단한 성향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쉽게 허물어졌고 오랫동안 슬픔 가운데 살게 했다.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동생은 나만큼은 아니었다.
조금 무던하고, ‘될 대로 되라’ ‘나는 모르겠다’를 기본 자세로 갖고 사는 아이이기 때문에 어릴 때도,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그때 그 장면에서 꽤 멀리 도망쳐 나와 있다.
부럽다, 또 다행이다. 물론 동생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상흔까진 모두 다 알 순 없겠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올 게 오고 말았으니…, 맞다. ‘사춘기’가 왔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은 하나 같이 “너는 사춘기랄 게 없이 지나갔어.”라고 한다마는,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깊은 우울과 불안으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분명 티가 났을 텐데, 드러났을 텐데. 아니 일부러 두 분에게 상처 주기 위한 말을 만들어 했고
날카로운 눈빛과 거친 몸짓으로 주변 여러 사람을 괴롭힌 나였는데,
도대체 두 분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집을 나간다거나, 싸움을 하고 다닌다거나, 술담배에 손을 댄다거나, 공부를 안 한다거나,
뭐, 그런 쪽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겉은 매우 조용잔잔하나 마음 깊은 곳은 이미 큰 격동을 겪어내어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나에 대해,
그럼에도 두 분은 그만 하면 참 다행이다, 라고 한다. 고맙다, 한다.
부모 속 썩인 일 없이 무난히 잘 자라주어, 자기 할 일 하고 밥 벌어먹고 살아주어,
건강하게 지내주어, 고맙다 한다.
아무튼, 사춘기는 대학 진학하고서도 일 년 정도 계속됐고
집안에는 크고 작은 분란과 갈등, 가끔은 치고받는 싸움이 이어졌다.
그사이 잘 버텨오던 가계 경제가 급속히 기울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이십 년 넘게 운영했던 사진관은 한때
가게 두 칸을 터서 평수 확장을 했을 만큼 꽤 잘 되었는데,
확장 이후 십여 년 만에 다시 칸을 줄여 정리해야 했다.
이마저도 몇 년 후엔 완전히 폐업, 이전에는 사진관에 가야지만 증명사진, 가족사진,
돌백일 사진을 찍었는데 디지털카메라 보급으로 더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사진을,
편히 인화할 수 있게 됐다.
IMF 때도 잘 버텨냈던 두 분이었는데, 다른 사진관이 다 망해 사라져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냈던
두 분의 가게였는데, 시대 변화와 기술 발전 앞에서는 더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와중에 세 살 터울 동생은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매달 수백만 원이 더 필요했다.
고가의 입시 학원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기에,
동생은 조금 먼 곳에 있는 적당한 학원으로 매일 지하철, 버스를 타며 음악 공부를 하러 다녔고,
아버지, 어머니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무리해서 일을 했다.
그 탓에 어머니는 큰 병을 얻게 됐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 호르몬 치료를 받게 된다.
이 모든 게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일, 어머니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막막하고 캄캄하고, 그럼에도 대학 공부하는 딸과 대학 준비하는 딸을 위해, 어떻게 버텨야만 했다, 라고.
그렇게 동생은 음악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후엔 더 큰 돈이 든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오십 살이 넘은 나이에도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다.
지난 이십여 년을 나름 사진관 ‘대표’ ‘사장’ 소리 들어가며 살아왔던 그는,
순식간에 오토바이 타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배달하는 ‘라이더’가 됐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가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 병원 입원과 수술. 그럼에도 아버지는 꽤 오래 배달 일을 해야 했다.
당신 딸뻘 되는 매니저와 동료 기사의 무시, 멸시에도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