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그렇게 봄이 왔고 여름이 왔다.
단 일 분도 뛰지 못해 헉헉댔던 나는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삼사십 분은 너끈히 뛰는 몸이 됐다.
거리로 치면 오 킬로미터 가량 된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러닝에 완전히 미쳐 석 달을 매일 같이 뛰기 시작했다.
비가 와도 뛰고, 새벽에도 뛰고, 퇴근이 늦을 때는 집 앞 보도블록을 오고 가며
단 일이 킬로미터라도 뛰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나는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고야 말았는데….
안 뛰면 안 될 것 같고, 그간 쌓아 올린 '러닝 마일리지'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고,
실력이랄 것도 없으면서, 기술이랄 것도 없으면서 괜히 다 잊어버린 것만 같고….
그렇다. 일종의 강박 같은 게 생긴 것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노력 덕에 그해 12월, 쉬지 않고 십 킬로미터를 뛰는 사람이 되었으나,
그 바로 다음 달인 올해 1월, 왼쪽 발목 부상으로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까지 고생하고 있다.
며칠을 절뚝대다 결국 병원에 갔다.
무슨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 주사가 좋다, 저 주사도 괜찮다,
아, 근데 비급여예요. 서류 금방 해서 드릴게요.
당시 나는 이 통증을 '빨리' 고쳐야만 했다.
지난 일 년간 얼마나 어렵게 쌓은 실력인데, 빨리 나가 뛰어야 해. 빨리, 빨리.
그래서 나는 발목 주변, 정확히 말해 왼쪽 복숭아뼈 안팎으로 주사 바늘을 찔러
무슨 포도당 같은 걸 주입하는 치료를 받게 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오래전에 손상되어 만성 통증이 있는 부위는 갓 다친(?) 부상처럼 자가 재건되긴 어렵다.
그래서 불순물을 주사하여 임의적인 손상을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몸이 '어? 얘 지금 아프네? 여러분, 일을 합시다, 일을.' 하며
다친 부위를 치료한다,라는 설명이다.
아무튼 나는 이 말에 홀린 듯 넘어가 버렸고 꽤 큰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염증 퇴치에 집중했다.
그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주사 치료 효과는 있을 건데, 발목은 쉽게 낫는 부위가 아니에요.
계속 써야 하잖아요. 안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주사를 맞기 전과 비교하면 통증 정도는 크게 줄었으나 그렇다고 말끔히 사라진 건 또 아니었다.
그냥 은근히, 계속 아프다. 이즘에서 나는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치료 중단.
비용도 비용인데 이렇게 주사를 찔러 대고 몸에 포도당 같은 걸 밀어 넣고
찔끔찔끔 나아지는 '듯한' 상태를 지속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어차피 계속해서 걷고 뛸 사람이고 통증은 한 번에 싹 오려 낼 수 없고, 주사 치료는 그때만 반짝이고. 그렇다면 통증을 안고 간다. 다만 통증을 이길 더 튼튼한 발목을 만들어야겠어.
다리를 잘 쓰는 법을 배워야지. 아니, 몸 자체를 잘 쓰고 싶어.
그때부터 나의 러닝 모토는 더 오래 뛰자, 덜 아프게 뛰자, 가 됐다.
올해 봄, 두 달여 만에 러닝도 재개했다. 아주 천천히, 가볍게.
뛰고 나선 얼음찜질하고 마사지했다.
발목을 아껴 써야 해.
근력운동 루틴에 '카프 레이즈'를 추가했다.
발끝을 계단 같은 데에 올려놓고 위아래로 몸을 들어 올리는 동작인데 쉽게 말해 '까치발'이다.
발목 힘을 이용하여 몸을 천천히 들었다 내렸다, 하는 모양을 생각하면 된다.
그간 하기 싫어 기구 운동으로 대체했던 스쿼트, 데드리프트도 다시 시작했다.
여기에 런지 추가.
한쪽 다리를 앞에 두고 무릎을 굽혀 앉는 동작인데 중심을 잡기 위해 온몸이 아주 열일해야 한다.
오른쪽 다리는 기능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런지 역시 매우 쉽게 했다.
(태권도할 때 오른발잡이였다. 오른쪽 다리는 종목을 막론하고 잘 쓴다.)
반면 왼쪽 다리는 총체적 난국이다.
발목부터 무릎, 고관절 등등, 살짝 굽혀 앉으려 하면 지진이라도 난 듯 쉴 새 없이 기우뚱댄다.
근육 자극도 형편없다. 오른 다리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동작이고
의도했던 부위에 자극을 정확히 꽂아 넣을 수 있는 반면, 왼 다리는 엉뚱한 데가 아프고 가동 범위도 짧다.
그럼에도 포기는 없다. 되든 안 되든, 덜 되든 그냥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전만큼의 마일리지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
안 아픈 건 아니다. 통증은 여전하다.
다만 이전에는 일이 킬로미터 뛰면 절뚝대며 집에 가야 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육칠 킬로미터까진 그럭저럭 괜찮다. 그다음부턴 아프지만.
그사이 나는 러닝 모토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더 오래, 덜 아프게, 그리고 '재밌게'.
뛰는 행위 자체가 고통이 되지 않길 바란다.
즐겁게, 재밌게 뛰고 싶다.
몇 주 전 나는 첫 하프 코스를 완주했다.
21킬로미터 하고 조금 더 뛴다. 42.195킬로미터의 딱 절반만큼 거리이다.
주최하는 곳 이름을 밝혀 적진 않겠으나, 여러모로 엉망진창이긴 했다마는,
그럼에도 완주했단 사실은 변함없다.
신청은 두세 달 전 즈음으로 기억한다.
이미 와인을 한두 잔 마신 상태였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으며,
그래서 남은 시간 꾸준히 거리를 늘려가다 보면 하프 정도는 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사실 하프 코스는 내년 목표였다.
올해는 오 킬로미터, 십 킬로미터 정도만 산뜻하게 나가보자, 였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미 큰돈을 썼고, 그 와중에 주변 사람에게 "저, 하프 나갑니다."라며 내뱉은 말이 있다 보니….
해야지요. 저는 쓴 돈과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참 어른이거든요.
나름 열심을 내어보려 하였으나 솔직히 이번 여름은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 늦은 시간에도 삼십 도가 넘었으니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나겠구나, 싶어 야외 러닝은 과감히 포기,
주로 근력 운동 후 삼사십 분 트레드 밀 러닝,
또는 근력 운동 쉬고 한 시간, 한 시간 반 러닝 하는 방식으로 연습했다.
아, 근데. 머신 러닝도 덥긴 덥더이다. 올여름 정말 최악이었어요.
최장 거리 기록은 십오 킬로미터 정도, 왼쪽 발목은 여전히 삐거덕댔다.
하프 뛸 수 있는 사람?(아님) 하프 도전하는 사람?(맞음)
말 그대로 도전이다, 도전.
연습이 충분치 않고 통증도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작전을 세워 찬찬히 접근했다.
오 킬로미터 지점마다 잠시 쉬어 아픈 다리를 점검하고 충분히 숨을 고른 다음 물 한잔하고 출발,
이렇게 총 네 번 반복한다.
만에 하나, 너무 아프고 괴롭고 더는 '재미없다' 싶은 마음이 들면 가차 없이 중도 포기한다,라는 생각으로 나갔는데…. 오? 통증은 예상외로 견딜 만했다.
전날부터 네 시간 간격으로 먹은 소염진통제 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음…. 약간의 긴장감 덕분인가? 이게 설마 러너스 하이?
전날 저녁, 당일 아침 때려(?) 먹은 고함량 비타민 B 효과?
급수를 위해 잠깐 멈추어 선 것을 빼면 두 시간 반을 쉬지 않고 뛰었으며,
이는 삼십사 년 삶 가운데 최장 시간, 최장 거리였다.
러닝의 '참맛'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생각한다.
우리 사는 데에 있어 이렇게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하다 보면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멀리, 또 빨리 뛸 수 있고
그 사이 관절과 주변 근육은 '러닝'에 적합한 모양과 기능을 갖추어 나간다.
몸의 힘 자체가 는다.
그리고 그 힘은 매일 아침 '아오, 출근하기 싫어.' 하며 조금 더 박력 있게 몸을 일으키게 하고
집 밖에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들어오는 저녁 무렵까지,
세상으로부터 날아오는 수백수천 발의 총알을 막는 방패가 되며,
때에 따라 무섭게 으르렁 대고 짖어(?) 대며, '어른의 참지 않음'을 보여줄 때 써먹을 만한 무기가 된다.
나의 경우에는 그 '조금'이 아주아주아주 조금이라 가끔은 답답갑갑하고 좌절실망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처음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 정말 큰 걸음이 됐다.
이렇게 러닝은 준비부터 과정, 결과 전반이 세상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다.
노력하면 된다. 적어도 그 노력이 다른 데로 가진 않는다.
아니, 잠깐만.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다, 라니.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네.
최근 몇 달간 나는 투명하지 않은 몇몇 어른의 앞뒤 다른 말과 눈빛에 아주 진저리를 치는 중이었다.
있잖아요, 그러 사람. '저의'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이요.
사람을 슬쩍 '떠보는' 그런 말과 가만히 반응을 살펴보는 눈빛, 정말 진저리가 납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러닝을 더더욱 사랑하게 됐다.
맑고 깨끗투명하고 앞뒤좌우, 안과 밖이 모두 말갛게 비춰 보이는 속성, 러닝의 참맛.
러닝은 '육지(?)' 운동임이 분명한데, 어떤 측면에선 수중(?) 운동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아니다, 수륙양용(?)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하프 코스는 완주했고…. 사실 이 보다 더 큰 목표가 있긴 했다.
이삼십 분 정도, 사오 킬로미터 정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됐던 그 무렵, 나는 주변에 이런 말을 했더랬다.
마흔 살 전에(또는 그즈음에) 풀 마라톤을 뛰고 싶다,라고.
마흔 살…? 풀 마라톤…? 과연…? 자꾸 말을 줄이게 되네……?
하프 코스 완주를 이삼 킬로미터 정도 남긴 지점에서 나는 생각했다.
풀 코스는(헉헉) 보통 사람의 영역이(헉헉) 아니야.(헉… 헉.)
아침저녁 공기가 꽤나 차갑게 내려앉은 며칠 전 늦은 저녁,
마음먹고 조금 오래 뛸 생각으로 집 근처 공원을 찾았다. 하프 코스 완주 후 오육 일만이었다.
천천히 둘레를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이 조금 무겁다 싶었는데
어느 시점이 되니 적당히 땀도 나고 복숭아뼈 주변 통증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분명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너무 더운 날씨 탓에, 이즈음이면 약간 티라노사우르스(?) 주법으로 절뚝대며,
턱턱 무거운 걸음으로, 땀을 와장창 쏟아내며 달렸을 텐데 희한하게 몸이 가볍다.
좋다, 너무 좋다.
순간 공원 한편에 걸린 전광판으로 눈길이 갔다.
밝은 초록 색의 굵은 글씨로 지나가는 안내 문구, '천천히 속도를 줄이세요.'
사실 그 앞에 주어는 '자전거'였다. 하지만 주어는 읽기 나름, 갖다 쓰기 나름이지 않나.
나는 자전거 대신 주어 자리에 '나'를 옮겨 놓았다.
그리고 작년 한참 러닝에 미쳐있던 당시, 겁도 없이 늘어놓곤 했던 그 말,
그 꿈(?)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보고 손을 좀 봐야(?)겠단 결심을 했다.
마흔 살 전에 풀 마라톤이라, 글쎄.
아니, 근데 문장 구조가 왜 이렇게 익숙하지?
맞다. 이 문장은 꼭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며, 그 결혼은 스물여덟부터 서른서너 살 사이에 '해야만' 하고,
결혼하면 몇 년 안에 아이를 낳아야 하며… 와 비슷하네?
나는 이와 같은 말을, 또 이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을 극히 혐오한다.
그렇게 치면 나는 아주 망한 인생이 되어버리므로, 나의 삶은 그렇게 평평납작하지 않으므로,
나란 사람은 흑백 화면이 아닌 UHD 풀 컬러 어쩌고, 이므로.
이 말을 처음 내뱉을 때만 해도 사실 조금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심각하지 않게, 생각나는 대로.
명확한 목적, 목표가 있어야만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러닝 연습에 게으름 피우지 않을 테니,
"대단하다, 야. 어떻게 그 긴 거리를 뛸 수가 있어?" 같은 말을 듣고 싶었기에,
또 그간 나는 못해, 안 돼, 라며 부정했던 '러닝'이란 영역에게 '아니,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에, 그래서 욕심을 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살펴보니, 나는 또 나란 사람에게 세상 험한 말로 명령했다.
십오 년 전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그때처럼.
너는 그렇게 해야 해, 더 노력해야 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만 해, 너는, 너는.
나에게는 사랑이 그렇고, 결혼과 임신출산이 그렇고, 삶을 관통하는 생각이 그렇듯,
러닝 역시 마찬가지이다. 꼭 그렇게 시기를 정해놓을 필요가 있나.
그냥 이렇게 뛰면 되지. 마흔 살, 오십 살, 육칠십 살이라도 아무 문제없어.
아니, 아니, 풀 마라톤일 필요 없지.
공원 한 바퀴, 강변 따라 두 바퀴, 버스 세 정거장, 지하철 네 개역을 이 두 발로 걷다 뛰다 해도 좋아.
나는 나를 위한 러닝을 하고 싶다.
이 두 발로부터 시작하여 두 발로 그 끝을 맺는 러닝.
더 오래 뛰기, 덜 아프게 뛰기. 뛰고 싶은 만큼 뛰기, 즐겁고 재밌게, 평화롭고 자유롭게 뛰기.
누가 시켰기 때문에 뛰지 않기,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뛰지 않기,
처벌받지 않기 위해,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 '너는 왜' 따위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뛰지 않기.
삼십여 년 전, 모래바닥과 아스팔트 골목 위를 냅다 뛰던 그때처럼 나는
나를 위한 러닝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싶다.
그리고 러닝의 '완성'을 아주 멀리 가져다 놓는다.
마흔 살, 오육십 살, 요즘은 백세시대이니 더 길게 봐야 한다.
완성 즈음의 나는, 수십 년 운동으로 허벅지 안팎이 쫙쫙 갈라지고
온몸이 기능, 협응하여 매끄럽게 이어지는 움직임에,
까맣게 탄 얼굴과 빨강, 파랑, 형광 초록(?)으로 맞춰 입은 옷과 운동화,
매일매일 길고 짧은 러닝으로 자기 삶을 가꿔가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있을 테다.
뛰는 몸, 뛸 수 있는 몸을 만들고 이를 아껴가며 적절히 쓰는 것,
러닝의 기쁨을 몸과 마음으로 만끽하는 것,
그런 사람으로 천천히, 오래오래 나이 들어가는 것, 익어 가는 것,
몇 번의 하프를 완주하고, 몇 번 풀 코스를 뛰었으며 기록이 어떻고 메달이 어떻고, 로는
감히 알 수 없는 진정한 '완성'이다.
아침저녁 날씨가 기가 막힌 요즘이다.
적당한 볕과 바람, 온도와 습도. 바야흐로 러닝의 계절이 다시 왔다.
오늘 저녁에도 공원 한 바퀴 뛰러 나가야겠다.
조금씩, 조금씩 러닝 마일리지를 쌓아야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아주 먼 미래이긴 하지만요.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2070년 즈음, '세상의 이런 일이'라든가, '생생정보'라든가, '인간극장'이라든가.
아무튼 이와 같은 TV 방송을 잘 살펴봐주세요.
백발의 러너, 몸짱 '최 씨 할머니'.
어린 시절 태권도 십 년 했고 아침점심저녁 세끼를 꼼꼼히 따져 먹고
스쿼트와 데드 리프트, 런지를 즐겨하며, 젊은 시절에는 사회복지사로 꽤나 열심히 살아왔고,
은퇴 후엔 매일같이 공원 주변을 천천히 뛰는 그런 할머니가 TV에 나올 수도 있거든요.
만일 그 할머니를 목격(?)하게 되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해 주세요.
그 할머니는 분명 아주아주 기쁜 마음으로, 엄지를 척 하고 들어 올릴 테니까요.
싸인, 사진 요청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