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리고 여름
일본의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통칭 고시엔. 8월만 되면 일본 열도가 들썩이는 축제와도 같은 대회입니다. 빠르면 6월 말, 평균적으로 7월 초에 시작되는 각 지역에서 치러지는 지역예선을 뚫고 오는 49개의 팀들이 고시엔에서 펼치는 대회가 바로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입니다. 일본의 고교야구팀의 개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서도쿄의 고교야구팀은 124개이고 동도쿄의 팀은 127개입니다.
현재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고교야구팀이 106개인 것을 감안하면 서도쿄만으로도 우리나라 고교야구팀 개수를 능가하는 일본 고교야구의 스케일이 매우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2024년을 기준으로 일본 전국에 있는 고교야구팀은 3441팀으로 한 팀이 고시엔에 나올 확률을 계산한다면 이는 1.42%에 그칩니다. 야구부가 창단된 지 꽤 오래되었지만 한 번도 고시엔에 나가보지 못한 학교도 있고 오랜 시간 동안 고시엔에 복귀하지 못하는 학교도 많습니다. (2024년 시마네현 대표 타이샤 고교의 경우 32년 만의 고시엔 진출) 이 1%의 확률을 뚫고 전국의 무대에 서는 청춘들을 보기 위한 것만으로도 고시엔의 인기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시엔이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하는 이유는 더 존재합니다.
일본의 야구대표팀의 팀명은 ‘사무라이 재팬’입니다. 일본의 야구 대표팀은 마치 전장에 나가 싸우는 사무라이처럼 한 경기 한 경기에 전력을 다해 싸웁니다. 죽음을 불사한 사무라이처럼 명예를 걸고 싸웁니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요? 일본의 야구소년들 역시 매 경기마다 전력을 다해 싸웁니다. 프로야구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1루에서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고교야구에서는 어렵지 않게, 아니 매일이라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선수들은 매 경기 전력을 다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여름 대회는 한 번 지면 그대로 끝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예선이 펼쳐지는 지역 중 가장 적은 수의 학교가 출전하는 돗토리 현의 경우라 하더라도 최소 5번을 연속으로 이겨야 고시엔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지면 그 순간 3학년은 고교야구가 끝나게 되고 1•2학년은 선배와 함께인 마지막 여름이 끝나는 것이기에 선수들은 더욱 전력으로 달립니다. 봄(센바츠)의 경우도 이와 같이 단판제이지만 봄 대회의 경우 여름대회보다 먼저 치러지고 ‘여름이 있으니’란 마음이 있기에 끝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 번이라도 지면 안 되는 여름의 싸움에서 선수들은 투혼의 땀방울을 흘립니다. 그 땀방울에 일본 열도는 열광합니다. 전 대회 우승팀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전국대회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실제로 2023년도 대회 우승팀인 게이오 기주쿠는 2024년 전국대회에 출장하지 못했음) 이 한 번의 싸움이 모든 야구팬들에게, 지역주민들에게 관심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라이 정신으로 일궈낸 열도, 그 위에서 벌어지는 결투. 일본인들에게 있어 고교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사무라이 정신을 지니고 있는 전통이고 역사인 것입니다.
일본의 사회를 보면 일본인들은 평소에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사회•문화적 요인과 관련이 있는데 일본에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우는 장면을 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본과 ‘공개된 울음’은 거리가 멉니다. 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집단주의를 중시하는 일본의 모습과도 연결되는데 눈물을 보이는 순간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게 되고 집단의 조화를 깰 수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시엔에서는, 고교야구에서는 어렵지 않게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경기에서나 승자와 패자는 나뉘기 마련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일본의 고교야구, 특히 여름 대회는 한 번 지면 끝인 토너먼트입니다. 여름대회에서 패한 3학년은 그대로 은퇴해야 합니다. 자신의 고교야구 커리어가 걸린 경기, 혹은 선배와 함께하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경기에서 패한다면 그 심정은 말로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청춘들은 그 마음을 그라운드에 쏟아냅니다. 경기 종료 직후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쏟아내는 눈물은 평소 눈물을 숨겨왔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적십니다. 평소 흘리고 싶어도 가려야 했던 그들에게 고시엔은 마음 놓고 울어도 되는 장소입니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위로받을 수 있는 내 진심을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시엔에서 눈물 흘리는 청춘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위로받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고시엔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입니다.
고시엔의 검은흙은 고시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고시엔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검은흙 위에서 펼쳐지는 경기에 선수들의 유니폼은 완전히 검게 물듭니다. 검은흙 위에서 울고 웃으며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보고 관중들은 이전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언제 저렇게 해맑게 웃었었지” , “저렇게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등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 선수를 보니 그때 그 선수가 떠오르네”라 하며 본인이 보았던 그 시절의 선수를 떠올리며 옛 추억에 잠기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도 2006년의 손수건 왕자를 기억하며 고시엔을 보는 분들이 많으시듯이, 또 손수건 왕자를 기억하며 새로운 선수를 바라보듯이 기억은 기억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 형이 뛰던 고시엔을 바라보던 어리기만 했던 아이가 2024년에 형이 달던 번호를 등에 지고 고시엔에 오른 것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기억이란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기억 안에서 각각의 청춘들은 계속해서 푸르게 남아있습니다. 검은흙과 푸르른 잔디 위에서 달리는 선수들, 울려 퍼지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이 모든 것이 기억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청춘으로 남습니다. 고시엔의 여름이 유독 푸르른 이유, 청춘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고시엔은 전통, 눈물, 청춘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없어선 안될 성지입니다. 이가 일본인들이 고시엔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