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편지
멀리 있지만 항상 곁을 지키는 그대에게,
며칠 전 집 근처 오일장에서 엄마가 단감나무 한 그루를 사 오셨어요.
"이 나무에 단감이 열릴 때까정 내가 살 수가 있것니?
그랴도 애들이 나중에 할머니가 사다 준 나무에 단감이 열렸다고 좋아하지 않것냐?"
여든 중반을 넘어서 아흔을 향해 가는 엄마의 난데없는 말씀에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엥? 무슨 말씀이셔? 엄만 백 살까지 건강하게 사실 건데~"
엄마의 뜬금없는 말씀에 가슴속에 서늘한 찬 바람이 휙 스쳐 지나갔어요.
"니 아부지가 먼저 갈지, 내가 먼저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겨. "
수년째 아픈 아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한 엄마잖아요.
노인의 건강은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겠지요.
식전마다 호미 하나 달랑 들고 텃밭에서 쭈그려 앉아서 풀을 뽑는 평생 농부 엄마예요.
막내 아이 등교 준비에 아버지 죽을 끓이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침 시간이지만 엄마는
오후에 동네 회관에 가야 하니 아침에 서둘러 밭일을 해두려는 것이지요.
엄마처럼 팔순 넘어서까지 부지런한 농부로 살아갈 자신도 정작 없어요.
남편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물뿌리개와 나무 묘목, 삽을 싣고 동네 회관 근처 밭을 향해 달렸어요.
겨우내 둘러놓았던 고라니 망을 풀어서 내려놓고 남편은 삽을 들고 구덩이를 깊게 파내려 갔어요.
그 사이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려 동네 은행나무 밑에 숨겨진 우물가에 달려갔지요.
도로가에서 멀찍이 동떨어진 우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고여 있거든요.
운 좋으면 나뭇잎 색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도 보호색으로 치장한 손바닥만 한 개구리도 만날 수 있고요.
지난번에 개구리와 딱 마추치기도 하였는데 처음엔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나뭇잎과 진흙이 한 몸이 되어 나뒹구는 숨겨진 우물가에 그렇게 커다란 개구리가 떡 버티고 있을 줄이야.
"너도 물먹으러 왔겠지~"
개구리는 사람에게 해로운 파충류가 아니어서 금방 친근한 마음이 들었고요.
물이끼 사이에 앉아서 개구리는 툭 튀어나온 두 눈을 끔벅끔벅 하였어요.
도망을 칠 기색은커녕 인기척에도 변화가 없어서 되려 혼자 놀란 게 민망할 정도였어요.
물뿌리개에 물을 찰랑 찰랑 욕심껏 담아왔어요.
걸어가는 걸음걸이에 맞춰 물방울이 한 움씩 발자국처럼 출렁거리면서 자국을 남겼어요.
남편은 그새 나무의 뿌리가 편안하게 잠길 만큼 넓게 구덩이를 파내었어요.
흙바닥에 흥건하게 물을 실컷 뿌려주었어요.
물뿌리개에서 물이 주루룩 쏟아지는 족족 흙구덩이는 스폰지처럼 물을 모두 빨아들였어요.
흠뻑 적셔진 흙바닥에 나무묘목의 뿌리를 곧게 펴서 자리를 잡아주었어요.
곁에 수북하게 파낸 흙더미를 삽으로 살뜰히 끌어당겨 나무뿌리를 차곡차곡 덮어주었어요.
그 흙위에 다시 한번 물을 인심좋게 뿌려주었고요.
남편은 나무를 심어본 적이 많다면서 한 마디를 보탰어요.
"흙으로 촘촘히 잘 덮어줘야 나무뿌리가 흙에서 뿌리를 잘 내려요."
남편은 자신의 말대로 장화 신은 두발로 나무뿌리를 덮은 구덩이에 서서 꼼꼼하게 흙을 빫아주었어요.
바람이 흙으로 파고 들어서는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면서요.
어쩐지 밭 귀퉁이에 나무를 심으며 기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어요.
과실수 중에 단감나무를 그리 좋아하느냐면 그렇지는 않거든요.
다만 엄마의 뜻대로 이뤄드려야 할 듯 해서요.
남편과 둘이 밭 귀퉁이에 단감나무를 심고 동네 회관의 문을 두드렸어요.
"엄마! 단감나무 소원대로 지금 막 심고 왔어요."
엄마는 동네 할머니들과 화투놀이에 빠진 엄마의 낯빛이 붉으레 하여 보기 좋았어요.
"그랴, 잘 했구만, 참 거실에 호박씨 챙겨놓은 거 깜박했네. 네가 오토바이 타고 후딱 가지고 올텨?"
엄마의 그 말씀에 주변에 가로 세로 제멋대로 누워계신 할머니들의 눈동자가 한순간 반짝이는 것 같았어요.
부리나케 집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 호박씨 심부름을 하여야했고요.
(원래 호박씨를 부탁한 두 할머니외에도 여러 할머니들 몫까지 호박씨가 금방 동이났다고 해요)
단감나무가 아니라 막대기를 꽂아놓은 듯 보이는 저 단감나무에서 이파리가 어느 순간 돋아나겠지요.
우리의 눈 너머 생명의 신비로움은 꿈틀거리고 있을 테니까요.
단감이 열리는 그날, 엄마가 처음 그 맛을 보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주 토요일, 제 편지를 오늘처럼 기다려 주실 테지요.
나와 그대의 5 퍼센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