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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단장

by 인아 Dec 05. 2024

L과 만나서 간단하게 이른 점심을 먹었다. L은 아침에 갑자기 부고문자를 받아서 정신이 없다고 했다. 확실히 다른 때보다 경황이 없어 보였다. 휴직 중이지만 내일 동료와 함께 조문을 같이 가기로 약속을 정했다고 했다. ‘아이가 이제 9살인데…’라는 말에 단순하게 직장동료 본인 혹은 동료 배우자 상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죽었는데?’라는 나의 물음에 L은 직장동료의 아이라고 했다. 이제 9살이 된 남자아이. 아이의 엄마는 나와 동갑이라고 했다. 부모나 배우자 상이 아닌 자녀 상이라는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곧 L의 다른 직장동료로부터 전화가 왔고 L은 어떻게 된 일이냐며 전화통화를 이어갔다. 통화하는 L의 눈은 점점 붉게 젖어갔고 L의 대화에서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던 직장동료의 첫째 아들, 어느 날 학교에서 운동회가 끝나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엄마는 단순히 전날 너무 무리해서 몸살이 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열은 내리지 않았고 큰 병원에서 급성 림프종 백혈병을 진단받았다고 한다. 멀쩡히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던 내 아이가 갑자기 급성 림프종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 여자는 아이 둘을 친정어머니의 손에 맡기고 워킹맘으로 살았다. 친정어머니는 딸 둘의 아이 넷을 모두 키워줬다고 한다. 둘째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여자는 첫째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돌봄 휴직을 사용했다. L의 전화통화 내용을 들으면서 내 눈도 같이 젖어들어갔다. 참을 수 없는 재채기가 나오듯 슬픔이 밀려왔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의 엄마를 안고 내가 울고 싶었다. L과 내가 종종 만나서 같이 먹었던 멸치국수는 그날따라 별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하얀 국수 면발은 점점 불어만 갔다. 우리는 침울한 마음을 서로 전염시키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국수를 먹었지만 그릇 안의 국수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 차가워진 아이는 첫 생일날 뭘 잡았을까?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이 가늘고 긴 국수처럼 길고 풍성한 실타래를 잡지. 그렇다면 혹여라도 큰 병에 걸렸더라도 완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아이는 뭘 잡았더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내가 먹고 있는 국수보다 훨씬 길고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실타래가 내 아이의 손에 쥐어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다음 날 조문을 갔다 온 L은 생각보다 상주가 담담하다고 전했다. 과연 그 담담함이 진정으로 담담하겠는가? 아이의 치료는 부모의 선택아래 중단되었다고 했다. 치료가 중단된 지 일주일 만에 아이는 부모의 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나고 아이 없는 집으로 돌아와 그 부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얼굴 모르는 엄마의 고통이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이웃집에서 살았던 남매가 있었다. 두 살 차이의 남매, 그리고 딱 그 가운데 나이의 나. 우리 셋은 동네를 쏘다니며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동네에 같은 나이 친구가 없던 나에게 그 남매는 그 시절 유일한 동네 친구였다. 남매 중 첫째인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와는 가끔 등굣길을 함께 하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작은 동네에서 사고가 났다. 긴 철근을 가득 실은 큰 트럭이 좁은 골목에 정차해 있었다. 집까지 빨리 가고 싶었던 아이는 트럭을 돌아가는 대신 트럭 아래로 기어갔다. 잠시만 아래로 기어가 반대쪽으로 빠져나오면 더 빠르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아이를 보지 못한 트럭이 움직였고, 아이는 차에 깔리고 말았다. 그날, 사고 소식을 들은 나의 엄마가 놀라서 그 집으로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차에 깔린 아이는 남매 중 오빠였다. 작은 아이가 차에 깔렸는데 몸에는 상처하나 없었다고 한다. 아이를 보내고 부부는 딸을 데리고 서울을 떠났다. 아이가 뛰어놀던 집과 동네에서는 살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후,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고 모두 딸이었다. 지금쯤 살아 있다면 아마 누군가의 남편이자 누군가의 아빠가 되었을 동네오빠. 그 당시의 나도 아직은 어려서 죽는다는 것을, 그것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가 우리 집에 전화해 나의 엄마를 찾을 때도, 나는 악의 없이 묻곤 했다.


‘아줌마, 목소리가 왜 그래요?’

‘응, 아줌마가 슬퍼서 그래.’

‘왜 슬픈데요?’

‘……’

순수했고 악의가 없었고 몰랐기에 어쩌면 그때 나의 물음은 더 잔인했을지도 모르겠다.


개그우먼 성현주 씨가 쓴 책 [너의 안부]에는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어린 아들을 3년간 병원에서 간호하다가 결국 떠나보낼 수밖에 없게 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저자는 생기가 가득한 아이와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저자에게 도착한 메시지는 빨리 서울로 다시 돌아오라는 남편의 연락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엄마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줬던 아이가 의식 없이 누워있다. 그렇게 3년간 병원에서 아이가 다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치료 중단을 결정하게 되고 아이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려 생명을 연장케 해 주던 약물이 중단되고 줄들이 다 제거되자 3년 만에 온전히 아이를 품에 안아볼 수 있었던 저자. 점점 더 차갑고 파랗게 변해가는 아이를 꽉 안으며 아이에게 마지막 자장가를 불러줬던 장면을 읽으며 나 역시 깊은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아이를 보내기로 결정하며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거 아닐까 라는 배우자의 말에 우리는 아이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저자. 아이를 보낸 후, 어느 날은 문득 잠에서 깨 깜빡 잠이 들었다며 병원으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며 놀라기도 했던 엄마의 마음을 감히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 모진 시간들을 겪었고, 지금도 겪어 내고 있을 그들이 나는 슬프고 아프다.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몸속의 어느 장기가 끊어져 너덜거리는 것만 같다. [너의 안부]를 읽고 주변에 많은 추천을 했다. 내 추천을 받고 책을 읽은 주변 지인들과 커피를 마시며 얘기하다가 괜스레 서러움에 복받쳐 서로 머쓱해하며 눈물을 닦아내기도 여러 번이었다. 

내가 저자에게 깊은 공감을 한 데에는 나 또한 그처럼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6년 전 내 평생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보물을 만났다.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자다. 그런 관점에서 나보다 더한 부자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아야만 된다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그날 L과 국수를 먹으며 다짐했다. 볼 수 있었는데 볼 수 없고, 들을 수 있었는데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있었는데 만질 수 없는 그 고통을 내가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내 옆에는 장난감 기찻길을 조립하며 사부작사부작 노는 아이가 있다. 난 그 아이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감각을 온전히 만끽한다. 이보다 더 부자가 될 순 없다고 다시 한번 깨닫는다. 


자신의 일부를 강탈당한 엄마를 떠올린다. 그 어떤 울분을 토해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삭히고 삼켜야만 하는 고통을 생각한다. 삭히고 삼키려 해도 어느 순간 울컥울컥 목구멍 밖으로 솟구쳐 올라 토출 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고통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만 하는 억울함을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그저 그들의 아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오로지 행복하기 만을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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