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력을 벗어난 밥솥
압력을 벗어난 밥솥
압력을 벗어난 압력밥솥이 수거함에 실렸다
압력은 활개를 편 가지보다 뿌리와 가까운 사이
굳이 바위를 파고든 뿌리를 옮기지 않는 이유이다
밥솥의 추처럼 그의 반생 역시 핑핑 돌았다
얕은 지층에서 그의 뿌리는 뜸을 들일 여유가 없었다
가난은 언제나 그에게 설익은 생각을 재촉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건 그였지만
그를 씻어 안치는 건 보이지 않는 시류時流였다
불순한 생각을 조물조물 헹구는 동안
밥솥은 백미와 잡곡을 가리지 않는다
거친 생계를 불리는 시간이 다를 뿐
묵은 습관이든 갓 찧은 가치관이든
밥맛만 좋으면 된다는 원칙주의자이다
한때 그는 급속취사를 선호한 적이 있다
꼬들꼬들해진 감정을 한 줄 말아 출장을 다녔다
보온에서 금방 덜어 낸 감정에 비해 눈치가 무디다는
심지어 싸늘히 굳었다는 평가에도
그는 밥솥의 압력을 견딜 이유가 없었다
실은 그가 겪은 세계가 모두 밥솥의 규격이었다
회사에서도 은행에서도 주민센터에서도 식당에서도
심지어 모든 걸 부려 놓고 들어간 사우나에서도
마음놓고 설설 끓어 본 적이 없었다
비로소 압력을 소진한 압력밥솥을 배웅하며
그는 먼저 간 아내의 이름을 불러 본다
출가한 자식들 얼굴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이태 전에 퇴직한 회사 상호를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풀 것도 없는 속내에 주걱을 놓고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