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내가 월 40만 원의 인세로 전업 작가를 시작했다고 했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40만 원으로 한 달을 살기엔 무리라는 걸 다들 알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달 인세를 40만 원 정도 받은 건 맞지만(그것도 두 종의 소설을 합쳐서) 그 돈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난 그동안 직장 생활하면서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썼다. 다달이 나오는 인세 + 그동안 직장 다니면서 모아둔 돈을 조금씩 아껴 쓴 것이다. 여기에 회사를 관둔 지 얼마 안 되어 본가로 들어가게 되어 식비와 주거비를 아낄 수 있었다. 돈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집안 사정 때문에 본가에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 그만큼 돈을 적게 쓸 수 있으니 적게 버는 작가로서는 다행이었다.
본가에 들어가서는 오직 카페와 집을 오가며 글을 썼다. 우리 가족 중 내가 작가가 되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원래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빠는 어려운 예술가의 고행길을 걷는 날 걱정만 하였고, 엄마는 내가 작가가 되었다며 좋아하셨다. 어쩌면 돈 못 버는 작가가 되겠다는데도 이토록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내게 거는 기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난 가족 구성원의 적당한 무관심과 미적지근한 지지 속에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다.
처음 전자책을 출간한 곳에서 몇 종의 책을 더 출간한 후, 난 다른 곳과 손을 잡았다. 전자책 출판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오로지 장르소설만 출간하는 전문 출판사였고, 다른 하나는 유통사를 겸한 출판사였다. 난 초반에 유통사를 겸한 출판사와만 일을 해왔다. 유통사가 자사의 책을 홍보하기에 적합할 거라는 영악한 셈조차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내게 손을 먼저 내밀어준 유통사와 계약했던 것 같다. 그렇게 유통사 몇 군데와 계약해서 전자책을 냈다. 그러다가 유통사가 아닌 장르소설 출판사와 계약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책을 내게 되었다.
코로나 전염병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을 내면 한 군데의 출판사와만 계약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개정판이라고 해서 같은 소설을 조금씩 수정해서 여러 출판사에 출간할 수 있었다. 각 출판사마다 독점 계약 기간이 있었고, 독점 기간만 지나면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출간할 수 있었으므로 같은 책이 표지만 바뀌어서 여러 출판사로 출간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비록 책을 낸 지 일이 년이 지났더라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할 때마다 조금씩 인세를 더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책을 여러 출판사에서 내기 힘들어졌다. 이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작가와 책이 많아지다 보니 굳이 출판사 측에서 구간을 반기지 않는 거다. 물론, 엄청 히트한 작품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전업 작가가 된 이후로 난 일 년에 5~6종씩 전자책을 냈다. 그런데 이중에는 2권 짜리도 있고, 3권 짜리도 끼어 있었으므로, 권 수로만 따지자면 10 권 정도의 책을 낸 셈이다. 한 권당 분량은 대략 A4로 120~140장 정도고 공백 포함으로 14만 자 안팎이었기 때문에 1 년 동안 꽤 많은 글을 쓴 셈이다. 이렇게 굳어진 글 쓰는 습관은 지금도 쭉 이어져서 지금도 여전히 일 년에 14만 자 정도의 책을 대여섯 권씩 쓰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전자책 위주로, 지금은 연재형 웹소설로 쓰고 있다는 점이지만 지금도 웹소설만이 아닌 단행본도 병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 년에 글 쓰는 분량이 그리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
본가에서 4년 반쯤 살았을 때, 난 갑자기 독립하게 되었다. 나이도 있으니 부모님 댁에 계속 얹혀 살기가 미안했고, 더욱이 나만의 공간을 갖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본가로 들어가기 전에 자유롭게 살았듯이, 어느 누구에게도 터치받지 않는 삶이 그리웠다.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대며 독립했고, 부모님은 나의 두 번째 독립을 응원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셨다. 특히 엄마는 더 좋아하셨는데, 그 이유는 나와 함께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오래된 피아노를 함께 처분할 수 있어서였다. 피아노가 빠진 자리에 본인만의 그림 작업 공간을 만들겠다며 소녀처럼 들떠하셨다.
그리하여 난 케케묵은 피아노와 함께 새 집으로 이사했다. 작고 귀엽지만 모든 게 새것인 그야말로 '새 집'에서 난 전업 작가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본가에서 캥거루처럼 붙어 지내며 숙식을 해결했던 때보다는 삶의 난이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각종 공과금, 집세, 식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전보다 글을 2배로 쓴다거나,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라면만 끓여 먹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뒤에서도 따로 밝히겠지만, 본가에서 독립을 한 이후에도 내가 집과 카페를 오가며 쓴 돈은 20만 원을 웃돌았고, 식비에도 크게 돈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난 언제나 카페에 들어가면 그날 마시고 싶은 음료수를 마셨다. 그게 4천 원짜리 아메리카노이든, 7천 원짜리 신메뉴이든 상관없이. 그리고 출출해지면 먹고 싶은 음식점 아무 데나 가서 먹었다. 그게 스파게티든, 초밥이든 상관없이.
물론, 카페에서 원하는 걸 마시고 음식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려면 그만큼 돈이 많이 들겠지만, 까짓 거 먹고 싶은 거 먹고 글을 더 많이 쓰면 되지 싶어서 크게 먹는 거에 돈을 아끼진 않았던 것 같다. 이 세상에 먹으려고 태어났는데, 돈이 없어서 좋아하는 걸 못 먹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말이다. 다행히 잘 먹은 만큼 글도 잘 써졌고, 덕분에 허덕이는 삶을 살까 봐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그 후로 지금까지 쭉 잘 지내오고 있다.
코로나가 발병하던 2019년 전에는 주로 전자책을 냈다. 중간에 웹소설을 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주로 로맨스 위주의 단행본 전자책을 내오다가 코로나가 발병하면서 본격적으로 웹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가 나의 작가인생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온 건 아니었다. 단지 내 소설이 더는 단행본으로서의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는 판단에 자연스럽게 웹소설로 옮겨간 것뿐이었다. 그렇게 난 N 플랫폼에 웹소설을 몇 차례 론칭했고, 몇 번은 망했고 몇 번은 중간 정도의 성적을 얻게 되었다.
대유행이었던 코로나가 끝난 지금 시기에 난 원래의 내 장르에서 벗어나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중이다. 아무래도 한 곳에 너무 오래 고여있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작가도 재미없고 독자도 지루해질 글만 양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장르의 글을 도전하려니 떨린다. 나⋯ 잘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