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는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의 기상 시간이다. 주말에는 좀 더 늦게 일어난다. 8시나 9시쯤. 그동안의 부족했던 수면시간을 주말에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평일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잠을 자서 아침 6시에 일어나는데,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본가에 가서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가에서 일을 거든다고 하니 본가에서 무슨 농사를 짓거나 식당 일을 거드는 줄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짧게 설명하자면 본가에서 살림을 거든다. 연로하고 몸이 편찮으신 부모님께서 살림을 잘 못 하시기 때문에 1시간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가서 식사 준비, 빨래, 청소 등을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약해 빠진 체력을 고작 집안일을 하는데 다 소진할 순 없다. 남은 체력을 비축해 두었다가 글 쓰는 데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충, 육안상으로 깔끔해 보일 정도로만 집안일을 해주고 부랴부랴 본가에서 나온다.
앞서 말한 대로 난 저질 체력을 가졌기 때문에 글 쓰는 데 쓸 체력을 항시 남겨두어야 한다. 보통 본가에 갔다가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오면 체력이 방전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쓰러지기 때문에, 노트북이 든 백팩을 일부러 메고 간다. 그러다가 본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글을 쓴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은 이전에 썼던 현대로맨스 외전과 곧 심사에 들어갈 현대로맨스, 그리고 곧 론칭을 앞둔 현대판타지 원고다.
카페에서 즐겨마시는 음료는 우유를 두유로 바꾼 아이스라테에 무료로 바닐라시럽을 추가한 음료로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보았던 추천 메뉴다. 스타벅스에서는 주로 달달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파스쿠찌에서는 아이스 초코를 마시고, 폴바셋에서는 아이스크림이 한 스쿱 들어간 아이스크림 라테를 마신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두세 시간 카페에서 글을 쓴 다음 집에 간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유튜브로 그간 못 본 예능프로와 드라마를 보고 책을 보면서 조용한 밤을 보낸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난 정말 따분한 나날을 보내는 것 같다.
얼마 전 친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넌 스트레스를 뭘로 풀어?"
그 친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미술관도 가고, 경복궁도 가고, 돈 모아서 가까운 나라에도 가보고. 그런데 난 딱히 어딘가를 가는 걸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술 마시거나 노래방에 가는 등 유흥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동호회 활동을 하며 친목하는 것도 안 좋아하고, 악기를 배우거나 춤을 배우고 싶지도 않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본가에서 집안일을 하고 돌아오면 이미 기진맥진, 거기에 글까지 쓰고 나면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이 나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한 영화가 내게 다가왔다. 영화의 제목은 '퍼펙트 데이즈'였다.
실은 운명처럼 영화가 내게 다가온 게 아니라, 내가 고대하던 그 영화를 보러 일부러 노원에 있는 더숲아트시네마에 간 거였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의 날로서 영화표 값이 6천 원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6천 원으로 영화표를 끊고, 극장과 붙은 브런치 카페 '더숲'에서 1만 3천 원짜리 봉골레 파스타를 먹었다. 결론은 봉골레 파스타는 실망했지만,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퍼펙트 데이즈'는 어떤 영화인가?
2023년 칸느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다. 하지만 난 '퍼펙트 데이즈'를 어느 유튜버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 유튜버가 하도 영화에 대한 칭찬을 하길래 호기심으로 보러 갔었다. 심지어 난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남주가 수십 년 전에 보았던 '쉘 위 댄스'의 남주인 야쿠쇼 코지인 것도 몰랐었다.
영화는 매우 지루하게 흘러간다. 남주인 히라야마가 밖에서 들리는 빗자루 소리에 일어나고, 밖에 나갈 때 현관 앞 동전을 갖고 나가 자판기에서 늘 같은 커피를 뽑아 마시고, 운전하면서 흘러간 옛 팝송을 듣고, 도쿄의 공중화장실에 도착하면 작업복을 입은 채로 일에 착수한다. 변화가 없는 매일매일 반복적인 삶. 게다가 화장실 청소부라는 것이 어떠한 스펙터클한 변화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에 더더욱 따분한 일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히라야마는 늘 정해진 삶 속에서 작은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진 찍는 게 취미인 그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햇살을 찍고, 엄마를 잃어서 슬픈 아이에게 엄마를 찾아주고, 오래된 카메라의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선술집에서 늘 즐겨마시는 생맥주와 안주를 먹고, 따뜻한 구식 온천탕에서 하루의 노곤함을 푼다.
영화를 보다 보니 나의 하루에 대해 되새김질하게 되었다. 늘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하루. 집안일을 마치고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두들기며 늘 쓰던 원고를 쓰는 나의 하루는 알고 보니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영화 속 히라야마처럼 나의 하루에도 소소한 즐거움이 숨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소프트 아이스크림. 과거에 도쿄 오다이바에서 먹었던 우유맛이 진한 소프트 아이스크림 맛을 잊지 못한 나는 그 후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폴바셋이나 백미당에서 파는 것이다. 그곳에서의 아이스크림만이 과거에 오다이바의 추억을 떠오르게 만드니까.
또 다른 하나는 힙합 음악이다. 난 오래전부터 힙합 음악을 즐겨 들었고, 그중 칸예웨스트, 제이지, 나스, 닥터드레, 50센트 등 유명한 힙합 음악을 즐겨 들었다. 얼마 전 칸예 웨스트가 고양시에서 리스닝 파티를 했다고 해서 화제였다. 왜 화제였느냐 하면, 리스닝 파티는 말 그대로 가수가 직접 노래 부르지 않고 음악만 틀어주는 파티 형식의 공연이었는데,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신곡 발표 이후에 수십 여곡의 음악을 생 라이브로 진행한 거였다.
"내가 거기 갔어야 해. 직접 칸예웨스트를 봤어야 했다고."
유튜브에서 때아닌 칸예웨스트의 라이브를 들은 광신도들 같은 팬들을 보며 난 후회와 부러움을 느꼈지만, 나도 안다. 이미 그런 곳에 갈 나이는 한참 지났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난 20대 초반부터 즐겨 듣던 힙합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아직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그러고 보니 '퍼펙트 데이즈'는 내 지루한 인생에 유리 파편처럼 짜릿한 깨달음을 준 영화였다. 잊고 있었던 내 일과를 행복하게 해주는 소소한 즐거움을 되새김질해주었으니까.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今度は今度、今は今]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혹자는 이 말 뜻을 지금이 가장 중요하니만큼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메시지라고 한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말뜻을 이해하려면 영화 속 내용의 맥락을 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조카와 히라야마가 자전거를 타던 중, 분위기에 취한 조카가 묻는다.
"이 강을 따라가면 바다가 나오겠죠?"
"그렇겠지."
"우리 바다까지 가볼래요?"
즉흥적인 어린 조카의 제안에 히라야마가 답한다.
"다음에.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이에 두 사람은 마치 돌림노래하듯 같은 말을 복창한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만약, '현재에 충실해라'라는 메시지였다면, 조카의 제안에 따라 히라야마가 바다까지 갔어야 했다. 왜냐하면 지금이 제일 소중하고, 내일은 안 올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바다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했으니, 특별한 하루에 목 매달 것 없이, 고요한 수면에 물수제비 뜨듯 출렁거리는 하루가 아닌, 잔잔한 하루를 살라는 말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