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에피소드 3
쉐어하우스에는 입주할 때 집주인 혹은 집을 관리하는 회사가 지켜야할 규칙을 안내해준다. 입주할 때 배포하는 공지사항이랄까. 그 공지사항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규칙’이다.
쉐어하우스에 살다보면 룸메이트들 사이에 지켜야하는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은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공용공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부엌은 어느 타이밍에 사용하고, 화장실은 얼마나 길게 사용 가능하며, 재활용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하고, 아침 출근 준비할 때 소음은 얼마나 허용되고, 냉장고 공용공간에 물건은 얼마나 놔둬야할지 등. 이런 이런 미묘한 규칙은 누구도 말로 규정짓지 않는다. 개인이 알아서 잘 감지하고 지켜야만 서로 피곤하지 않게 살 수 있다. 쉐어하우스에서의 진짜 스트레스는 요란한 사건 사고가 아니고,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작은 사건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분명 어젯밤 냉장고에 넣어둘 때만 해도 거의 꽉 차 있던 내 우유가 하룻밤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있다.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둔, 아껴 먹으려던 과자 봉지가 왠지 모르게 가벼워진 것 같다. 누가 내 냄비를 무단으로 사용한 것 같다. 쉐어하우스에서의 스트레스는 이렇게 소리 없이 사라지는 내 물건들, 주인이 불분명해지는 '공용'과 침범당하는 '개인'의 흐릿한 경계선 위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에서 시작된다.
최대 격전지는 단연 주방이다. 각자의 식재료와 간식으로 가득 찬 냉장고는 그야말로 땅따먹기의 공간이다. 칸을 나눠서 사용해도 공용공간에는 모두의 물건이 함께 들어가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식재로에는 이름표가 붙어있지만, 금방 사라지는 식재료에는 굳이 스티커를 붙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면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나 계란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물건이 야금야금 줄어드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소금 약간, 우유 조금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허락 없이 남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룸메이트 때문에 "모든 음식에 일일이 이름을 써 붙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결국 모든 내 물건에 견출지를 붙여두면, 물건이 한껏 볼품없어 진다. 중학교 사물함의 모습이 연상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다. 수용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남이 내 물건을 만지는게 싫어서 모양 빠져도 물건마다 이름을 적어놓지만 이내 그것마저 소용없어 진다. 결국 누군가는 내 그릇을 쓰고 설거지를 미루고 싱크대에 던져놓는다. 정작 내가 밥을 먹으려 할 때, 나는 남이 쓴 내 그릇을 먼저 닦아야 하는 황당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단전에서부터 빡침이 올라온다.
심지어 나는 쉐어하우스에 살았던 당시 육고기를 먹지 않아 내 냄비와 후라이팬을 개인적으로 따로 사용했다. 그런데 내 후라인팬에 삼겹살 구워먹고 설거지도 안하고 던져놓은 걸 목격하고 정말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후라이팬 새로 사내라고 하고 싶은 심정. 손잡이에 떡하니 있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걸까? 일부러 괴롭히는건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내가 너무 속 좁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화를 혼자 삭이는 패턴의 무한 반복이다. 나중에는 그냥 모두 다 포기하게 된다. 공용 양념과 개인 양념, 공용 식기와 개인 식기를 아무리 구분해봤자 소용없다는걸 깨닫는다. 공용은 다 같이 사용하고 네건 네거고, 내것도 네것이고…점점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주방만큼이나 예민한 공간은 바로 욕실이다. 샴푸나 바디워시는 이름표가 명확하게 붙어있으니 그렇다 쳐도, 애매하게 놓인 비누는 쓸 때마다 찝찝함을 남긴다. 그렇지만 이건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 번쯤 내 샴푸 빌려쓴다고 큰 일이 나지도 않고, 사실 내가 모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르는게 정신 건강에는 훨씬 좋다.
무엇보다 화장실에서 가장 큰 빡침의 원인은 휴지이다. 마지막 칸을 쓴 사람이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은 인류 보편의 상식 아니었던가. 운 좋게도 내가 살았던 집 휴지는 회사에서 제공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휴지심을 마주하는 아침은 빡침을 불러온다. 휴지 서랍이 바로 앞에 있건만, 제발 다 썼으면 좀 채워두란 말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공용 물건에 대한 암묵적인 규칙이야말로 쉐어하우스의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이런 것까지 말하기엔 내가 너무 쪼잔해 보이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속으로만 끙끙 앓는 날들이 쌓여가고 점점 더 혼자 빡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 성격이 이상한가보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하기엔 사소하지만 참기에는 속 터지는 이 문제들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 현명한걸까? 서로 존중하고 매일 아침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명시적으로 규칙을 지켜야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런 미묘한 부분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굳이 표현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채는 능력만이 쉐어하우스에 살면서 점점 더 고도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