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오는 눈을 비비며 한가득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 올려 식탁에 얹었다. 커피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네가 말하던 갖가지 커피의 원료들을 보고 거짓 웃음으로 웃은 뒤 10만 원 남짓한 커피 머신으로 흘려보냈다. 솔직히 이 맛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캡슐의 색이 맘에 들면 그런 채로 커피를 내려 마셨다.
윙하고 물이 끓고 쪼르르 커피가 나오기까지 공백의 시간 동안 햇빛이 보고 싶어져 커튼을 밀쳤다. 우중충한 하늘의 회색빛이 눈에 들어왔을 때 거실의 휴대폰에서 흐린 날씨라고 말하는 알람이 들려왔다.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새파란 하늘의 채도 바를 주욱 내려 혼탁하게 만든 탁한 남색 그 이상의 무채색스러운 회색빛이었다.
비는 올듯 말듯 간지럽게 나를 긁고 있었으니 창문을 열어 손을 뻗어보고 나서야 우산의 필요성을 가늠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내려둔 커피 방울이 뚝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려 입에 가져가기 전 물 한 컵을 섞어 저어냈다. 어른은 쓴 커피도 잘 마신다는데 그러지 못한 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사용한 얄팍한 술수였다.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홀짝인 뒤 식탁에 놓인 꼬질꼬질하게 접힌 냅킨 위로 너의 이름 석자가 보였다. 네가 출근 전 어떤 말을 남겨놓은 듯했다. 너는 항상 이런 방식을 즐겼다. 스마트폰이나 전화로 편하게 남길 수 있는 말을 휴지조각이나 종이조각에 적어 걸핏하면 지나칠만한 장소에 붙여 내 시력을 시험했다. 순서대로 단서를 찾아 해결하는 어떠한 퍼즐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던 너는 이런 놀이를 즐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나는 만족스러워하는 너를 보며 기분 좋게 그 게임을 즐겼다.
오늘의 게임은 조금 이상했다. 냅킨을 가린 머그잔을 치우니 적힌 것이 여전히 네 이름 석자뿐이었으니 말이다. 콧잔등을 살살 긁으며 나는 셜록홈즈에 빙의해 숨겨진 의도를 파악했다. 그렇게 오전을 보냈다.
잠에 들지는 않았다. 몽롱한 시간을 보낸 건 내겐 종말의 시야를 봤다는 의미의 이야기였다. 처음 입을 열어 청자 없는 허공에 목소리를 들려주기까지 20분 남짓이 걸린 듯했다. 이름 석자, 이름 석자가 뜻하는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허연 바람이 나를 뒤덮어 모래 알갱이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 이름 석자로 공놀이를 했다. 꾸깃꾸깃 접어 던져진 내 이름조각이 차라리 비행기로 접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았더라면, 그렇게 비상해 낸 내 이름이 추락 후 아무도 없는 어느 곳에서 쓸쓸히 썩어간다면 하는 소박한 원도 끝내 이루어지는 일 없이 그렇게 수많은 발들에 치여갔다. 원래부터 공이었던 것처럼, 그러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차갑게 식은 커피가 어딘가 쓴 비린내를 풍기며 있었다. 처음에 꺼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커피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색빛도 빛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추는 모든 것을 밝히기는커녕 더 어둡게만 만드는 그 오묘한 회색을 나는 빛이라고 부르며 매달려하는 걸까.
새카만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보며 울었던 까닭은 '당신의 어두운 감정보다 더 어두운, 더 슬픈, 더 불명확한, 더 절망적인, 더 무에 가까운 것이 여기 있으니, 그대의 근심 걱정보다도 어두운 것이 이곳에 있으니 걱정 마시오.'라고 전하는 그림의 메시지에 감화당한 까닭이었다.
나는 초점을 잃은 채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기시감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머그잔도 네가 준 선물이었다. 바닥에 투박하게 이니셜을 새긴 청록색의 머그잔은 커피를 잔뜩 머금은 채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노려봤다. 해가 저물고 낮은 채도가 내려앉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였다. 그렇게 자색으로 물든 바다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