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간격으로 꽃집을 찾았다. 담배도 술도 않던 내게 주기적으로 꽃을 거실 한가운데 꽂아두는 건 개인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조금은 낭만적인 방법이었다. 꽃은 일주일 후면 색을 잃고 시들시들해졌다. 그러면 물갈이를 멈추고, 3일이 더 지나면 꽃병의 모든 물을 다 뺀다. 식물의 바싹 마른 줄기 끝이 가련하게 유리병 바닥을 더듬어 수분을 찾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게 되고, 정확히 2주가 지나면 꽃 한 다발이 생명력을 잃고 푸석해져 스치는 바람결에도 툭 툭 잎사귀를 떨어뜨렸다. 그러면 꽃을 꺼내 파를 썰듯 꽃을 잘라 모아두었다가, 창가의 다른 분재에 가루를 내어 뿌려주곤 했다.
출장을 다녀온 지방에서 낯이 익은 꽃집을 발견했다. 크지 않고 단정하되 익숙한 외관의 모습으로 도로가 끝없이 펼쳐진 시골 외딴곳에서 홀로 서 있는 것이 이질적인 느낌이었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을 넘어 언제나 방문했던 것만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나는 오랜 루틴을 깨고 늘 꽃을 샀던 곳이 아닌 그 꽃집에서 흰 수국 3송이를 비롯한 유칼립투스가 꽂힌 다발을 샀다. 유칼립투스 잎이 생생해서 그 단단함이 유난히 기억에 남겠다고 생각했다. 결제하려 카드를 꺼내자 꽃집 사장이 선물용이냐고 물었다. 집에 놓아둘 요량이라 대답하니 사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쳐다보기 시작했고, 나는 당혹감에 빠졌다.
"정말로 집에 둘 건가? 이 꽃을?"
계산을 마치고 땀을 삐질하게 흘리며 차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주인 할머니는 눈웃음이 아름다웠던 까닭에 눈매에 주름이 예쁘게 자리한 70대의 할머니였다. 꽃을 고르고 포장하는 동안 그녀의 모습이 사뭇 아름다워 그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차에 꽃을 놓고 타려고 하자 뒤에서 주인 할머니가 뛰어와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의 표정은 평화로웠고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웃음이 특별하게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해가 내리쬐는 낮임에도 회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고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죽기 전까지 딱 한 번 하루 뒤의 시간을 갈 수 있고, 딱 한 번 하루 전의 시간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마."
이게 무슨 말이지? 당혹감에 휩싸인 채 인사를 얼버무리며 급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빠져나왔을 터인데, 어째선지 마음 한구석이 편안했다. 마치 내 손에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온 것처럼.
우산을 들고 비를 맞는 이와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이는 다르다. 바로 그런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노년을 보내는데 심리적 불편함이 없었다. 무엇이 크게 잘못되면 하루 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 능력'이 실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자체가 뿜어내는 힘은 미래의 막연한 불안감 자체를 제거했다. 부자가 되는데 하루를 미리 아는 능력은 인생을 바꿀 만큼의 큰 의미가 없었기에 사용은 인생을 바꿀 만큼의 실수가 있을 때 하루 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정했다. 그래서일까. 마구 부유하지는 않지만 가난하지는 않은 행복한 노년이다.
이제 80살 아니, 몇 살인지도 모를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 헷갈리게 되고, 부서지는 햇살이 병실의 한쪽 면을 점점 젖게 할 때 타성으로 물든다. 나는 내 끝을 천천히 점지하고 있었다. 몸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다. 피가 말라붙고 심장은 여려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생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는 이미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심장박동이 평균 수치에서 조금만 위아래로 바뀌어도 심장이 반응하고 뇌가 저릿했다. 죽어가는 것이 이렇게 가벼운 것인가 할 정도로 생각이 휘발되어 공기 중에 흩뿌려지는 감각은 시원시원한 기분마저 줬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나는 내일 죽는다.
잊고 있던 능력이 기억났다. 하루 뒤의 시간과 하루 전의 시간을 갈 수 있는 능력. 내일 죽는 내가 내일로 간다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이동하는 건 몸일까 영혼일까 눈일까 코일까 손가락일까. 그렇게 고민을 10분 남짓 했을 때 고민의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어차피 내일 죽는데 무슨 고민이 필요하단 말인가. 꽃집 주인 할머니가 말한 방법으로 하루 뒤의 시간을 가는 능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뒤 펜과 종이 몇 장 남짓을 들고 눈을 감았다. 작은 어지럼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병실 그대로였다. 날짜도, 장소도 그리고 나도 모두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행동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이 미련하다 평가받는 기분이다. 허탈감과 함께 찾아온 것은 끝을 모르는 분노였다. 나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던졌고 소리를 질러댔다. 선반에 올려 둔 책더미가 쓰러지고 창가에 꽂아 둔 꽃다발이 쓰러져 유리가 깨졌다. 쨍그랑-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숨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혈압이 마구 오르고 머리가 점점 멍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기억에 빨갛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와 다급하게 달려오는 의료진들의 발걸음 소리는 영화적 연출을 입힌 것처럼 자잘히 산개하고 공기가 됐다. 이것이 죽음인가 느낄 겨를이 없이 찾아오는 흰색의 평안함이었다.
이윽고 여자는 숨졌다.
그리스의 한 소녀가 아름다운 아폴로의 눈동자를 보는 꿈을 꾸고 그 꿈에 매료되어 태양을 바라보다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자리에는 메리골드 꽃이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