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뉴스에 대서특필됐다. 괴한으로부터 시민을 지킨,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지킨 절세의 영웅으로서. 각종 언론사로부터 인터뷰가 빗발쳤다. 그는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단 하나의 언론사에게서만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모쪼록 말수를 아껴 제대로 된 분량조차 나오지 않은 탓에 그 침묵하는 시간마저 더하고 더해 뉴스에 내보냈던 것이 오히려 그에 대한 신비로움에 불을 지폈다. "칼을 든 괴한이 무섭지 않았습니까?", "당시 어떤 생각으로 맞서신 건가요?" 같은 질문에 멀뚱히 쳐다보는 것인지 혹은 고뇌하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얼마간 침묵한 뒤 "... 그래야만 했습니다."라고 답변을 일축했다. 통상적인 질문 세례를 받은 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가령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까지 이어지자 남자는 인터뷰를 멈추고 이후의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는 대중의 먹이가 되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했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남자는 그날따라 입맛이 없었음에도 그의 애인 애서와 저녁을 먹었다. 네온사인 사이로 빛이 찬란한 시내의 골목길을 걸었을 때 그는 무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의 무의미에 대한 것, 의미의 의미를 쫓다 보면 발견하는 끝없는 무의미의 늪에 빠졌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자 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의미와 의미의 시계추는 삶 전체를 전자운동에 맡겨버리며 잡힐 듯 말 듯 생각과 장난을 쳤고, 그는 가벼운 울렁증을 느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 좋았던 건 애서와 함께 있던 시간이었고, 싫었던 건 내 옷매를 귀찮게 붙잡고 있는 애서의 손가락이다.
남자는 애서와 애서의 손가락을 서로 다른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선 애서는 지나가는 여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솔직히 그의 눈에는, 그녀의 외모도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자신이 좋아하던 모양새를 쏙 빼닮아 매혹적인 자태로 흔들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의미 없는 만남을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잡기 위해 이어갔다. 사귀자는 고백마저 애서의 손가락을 보고 했으나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애가 길어지며 남자는 애서의 손가락과 더불어 애서 또한 늙어감을 포착했다. 주름이 한 줄, 한 줄 더해질 때마다 손을 더 꽉 부여잡았다. 그건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었을까? 운전할 때 가끔씩 보이는 앞차의 모습과 그 안에서 포개지는 연인의 입술이 그림자로 비칠 때면 남자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한 고통의 불쾌였다. 그는 사랑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술에 취한 괴한이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 순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생동감과 충동감이 남자의 몸을 휘감았다. 환호소리와 폭발이라는 의미 창조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의미 뒤에 힘 없이 추락해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폭죽이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이었던 까닭에 고민치 않고 괴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히려 그를 가로막는 건, 그의 '의미'를 가로막는 건 애서의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치고 나아갔다.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이 남자가 꿈꿔온 추락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몇 번의 악소리 이후 금방 도착한 경찰의 체포로 괴한은 제압됐고, 남자는 시민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적당한 찰과상과 침묵하는 능력은 대중의 관심을 사기 적합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만에 그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애서가 남자를 더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게 됐다는 점을 제외하면 달라진 건 그리 없는 듯했다. 대중의 뜨거웠던 관심도, 영웅이라며 추켜올리던 국회의원들도 정말 빠르게 침묵했다. 그들은 폭발해 추락했을 남자보다 어쩌면 더 빨리 바다로 빠져 식어버리는 존재, 의미라는 무게추에 발이 묶여 바다 위로 나와 숨 쉬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 남자는 그러한 이들이 가득한 세상에 불만이 크게 없었다. 그게 어쩌면 의미를 골몰히 생각하지 않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삶이 어떤 때는 장난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때는 진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면,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라는 역설 안에 갇히고 마는 것 아닌가? 이건 잔인한 조크의 연속이다.
그는 출근길마다 건너는 다리 위에서 항상 핸들을 꺾어 강으로 추락하는 상상을 했다. 오늘은 차가 많이 막히니 차 통째로 빠져드는 건 무리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남자는 조수석 문을 열고 힘차게 훈장을 던졌다. 훈장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 밑으로 추락한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