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점퍼를 입은 사나이
패키지 해외여행에서 인솔자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환승(Transfer) 과정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스마트폰 하나로 여행이 가능한 시대지만, 10년 전만 해도 낯선 외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다는 것은 여행객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지금도 경유지를 처음 방문하면 인솔자인 나조차 긴장될 때가 많다.
환승 과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유지에 대한 경험이 많아도 환승 과정은 늘 변수가 많다.
출발 항공기의 연착으로 환승 시간이 촉박해질 수도 있고, 보안 검색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 편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의 걷는 속도는 웬만한 경보 선수 못지않다. 손님들이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 불평하셔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그 고집 덕분에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시련은 찾아왔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출발 전날, 한 손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대개 이런 전화는 여행 취소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부부가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손님의 아내분이 화장실에서 넘어져 깁스를 하셨고, 결국 남편분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럽여행이 처음이라던 분이라 더욱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공항에서 만난 아버님은 예상보다 밝은 표정이었고, 새로 사신 듯한 노란색 점퍼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환승지는 인솔자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영국 히드로 공항이었다.
출발 전, 게이트 앞에서 30명이 넘는 여행객들에게 환승 시 주의사항을 철저히 설명했다.
히드로 공항은 터미널이 무려 4개나 되고, 비행기가 도착해도 브릿지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나는 손님들에게 셔틀버스에서 내리면 반드시 깃발을 들고 있는 인솔자를 찾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보딩패스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대비해 내가 보관했다가 비행기에서 내린 후 한 분씩 나눠드리기로 했다.
예상대로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 앞에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비행기 맨 앞 좌석에 앉았었기에 서둘러 첫 번째 셔틀버스를 탈수있었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깃발을 높이 들고 손님들을 기다렸다.
드디어 마지막 셔틀버스가 도착한 후 인원 점검을 시작했는데…
노란 점퍼를 입은 아버님의 성함을 불렀지만, 아버님은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몇번을 큰소리로 아버님 성함을 불러봤지만 아버님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해외 로밍이 활성화되지 않았던시절이라 연락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버님을 찾느라 시간을 지체하면 우리팀 전체가 비행기를놓치게 될수도 있는 긴급한 상황 이었다.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아버님이 실수로 다른 한국 관광객을 따라 입국장으로 가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아직 환승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나머지 손님들께 상황을 설명드린후 한곳에 모여계시도록 한후 나는 미아가 된 아이를 찾는 부모의 심정으로 입국장으로 뛰어갔다.
그 순간, 멀리서 노란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아버님의 손목을 붙잡고 단숨에 팀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우리팀은 말 그대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야 했다.
환승하는 또다른 터미널까지 셔틀버스로 무려 20분이나 타야했고 이미 환승 시간이 빠듯해진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보안 검색 구역이 붐비지 않았고 입국 심사도 단체라는 이유로 신속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팀은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한후 아버님은 나에게 오셔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하셨다.
하지만 만약 아버님이 노란 점퍼를 입고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그렇게 빨리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고, 상황은 더 심각해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아버님이 원망스럽기는커녕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다음 날부터 아버님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옐로우맨"이 되었다.
전날의 실수를 인정하시며 일행들께도 진심어린 사과도 하셨다.
지난 일은 빨리 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아시는지, 아버님은 여행내내 해맑은 모습이셨다.
심지어 팀의 반장을 자처하며 관광지 어디를 가든 노란 점퍼를 벗지 않으셨고, 팀의 마스코트가 되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후 환승이 포함된 여행팀을 이끌 때마다 "옐로우맨" 이야기를 들려주며 손님들에게 환승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 주셨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패키지여행을 인솔하며 손님들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한 장면, 한 장면 그림책 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그림책 전집을 선물해 주셨던, 나의 고객들이 그리운 날이 많다.
어디론가 패키지여행을 떠나야 하고, 환승을 해야 한다면
노란색 점퍼를 입어보자.
여러분은 절대 비행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인솔자들은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