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에서는

by 이선남

삼 년 전이었다. 마당에서 풀을 매다 허리를 폈다. 낯선 여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셋째딸인가요?”

“네.”

그 여자는 윗집의 윗집, 아흔이 넘은 어르신의 딸이라고 했다. 회관에 어르신을 데리러 가는 길이라 했다.

“엄마가 이 집 셋째딸이 이사 온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셋째딸이 제일 잘했고, 제일 이쁘다고.”

삼례집에 내려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새벽부터 집 정리를 하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딸 중에 제가 제일 못난이에요.”

그 언니가 옆을 가리켰다.

“남편?”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작은아들이에요.”

“아, 내가 눈이 잘 안 보여.”

그 언니도 웃으며 돌아섰다. 나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여보, 하던 일 하세요.”

작은아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학생인 아들은 내려오자마자 남편으로 오해받았다.

누군가의 딸로 불리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며칠 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농약을 사 오란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읍내에 나가는 김에 농약을, 그것도 풀약을 사 오라고 했단다. 나를 시키려고 몇 번이나 집에 왔는데 내가 없어서 남편에게 부탁했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간 김에 막걸리도 몇 병 사다 드려요.”

농약만 사다 드리면 괜히 정이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삼례에서는 심부름도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몇 달 뒤였다. 출근하려다 또랑 옆에서 발이 멈췄다. 연두색 싹이 올라와 있었다. 엄마가 옥수수를 심던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엄마는 옥수수를 심으면서 꼭 남편 이름을 불렀다.

“허허허, 혀누기가 옥수수를 굉장히 좋아 하잖여.”

그 말을 할 때 엄마는 늘 조금 신이 나 있었다. 울타리 밑 잡초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엄마는 가셨지만 엄마가 하던 일들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 주말 아들 둘이 삼례집에 왔다. 나는 막걸리 두 박스를 들려 회관에 다녀오라 했다.

삼례에서는 인사도 빈손으로 가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다. 다녀온 남편이 말했다.

“어르신들이 둘째 보고 묻더라. ‘산남이 신랑여?’”

“또요?”

“큰애 보고도 그러더라. ‘그럼 여기가 산남이 신랑이구먼.’”

남편이 결국 말했다고 한다.

“제가 산남이 신랑입니다.”

그러자 어르신들이 한바탕 웃었다고 했다. 삼례에서는 남편도, 아들도 가끔 신랑이 된다.


작년 11월 말이었다. 일이 겹치면서 두통이 도졌다. 혓바늘이 나고 목이 부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일요일이었지만 일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현관문이 울렸다.

“잉, 너는 김장 안 허징?”

동창 친구 어머님이 김치통을 안고 서 있었다. 막 담은 김치라며 밥 한 사발 먹고 가라 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밥을 한 공기 퍼 담고 김치 머리를 잘라 올렸다.배추를 베어 무는 순간 마늘이 혀를 찔렀다. 생강이 코끝으로 치고 올라왔다. 숨이 막혀 잠깐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동네 어르신들과 품앗이로 김장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김치를 먹다 말고 울었다. 그래도 젓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입안은 맵고 아팠는데 이상하게 자꾸 달았다. 남편이 방에서 나와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냐?”

나는 겨우 말했다.

“엄마 김치 맛이야.”

마늘이 듬뿍 들어간 엄마 김치 맛이었다. 엄마는 없고 그릇만 비어 있었다.


삼례에서는 사람이 떠나도 손이 하던 일은 남는다. 엄마가 떠난 뒤에도 옥수수는 자라고 김치는 익는다. 나는 오늘도 엄마가 하던 방식으로 김치를 먹는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