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자타국의 마지막 군주>
“그런데 말입니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잖습니까, 한기!”
“무슨 상황… 말씀이신지…?”
한기는 애써 시침을 뚝 떼며 물었다.
그러나 사신은 또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잔이 반파국 왕까지 꾀어 우리 신라를 공격했잖습니까! 다행히 이번에는 실패해서 꼬랑지를 내렸지요, 하하하! 허나 지금쯤 백잔의 군주는 땔나무더미에서 자고 쓸개를 씹으며 새로운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100년 하고도 수십 년 전, 그러니까 나물대왕(내물왕) 시절에 왜군과 금관국군까지 동원해 금성을 포위했듯이 말입니다!”
사신은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한기는 사신이 뜸을 들이면서 하려는 다음 말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은 정말 짜증날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아마 다음 번 침공은 이 자타국을 통해서 할 겁니다! 물론 한기께서는 반파국 왕이 한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으시겠지요, 하하하! 허나…, 저 교활한 백잔의 군주는 상인으로 위장한 병사들을 활용하여 이 저택을 기습하고 점령할 겁니다. 그 뒤의 일은 뭐…, 저놈들의 손에 일사천리로 진행되겠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사신은 또 입을 다물고서 뜸을 들였다.
한기는 이제 곧 나올 말을 짐작했기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미 이 자타국의 옛 병영은 우리 대왕께서 파견하신 병사들이 쓰고 있습니다. 이 저택에는 병력이 고작 수십 인에 불과하고요. 군대가 사실상 없는 군주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라면 말입니다, 한기! 차라리 금성에 가서 살겠습니다. 한기께서는 충성심이 높으시다지요? 그럼 우리 대왕을 늘 가까이서 모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하하!”
막상 이 말을 들으니 한기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곧 마음을 수습하고 신하들의 얼굴을 다시 하나하나 살폈다.
신하들은 예외 없이 이렇게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낫겠다. 이게 나라냐! 신라나 백제의 일개 촌장이나 다름없는 한기 휘하에서 가신(家臣) 노릇이나 할 바에는 그냥 지금 가진 재산이나 잘 굴리는 데에만 힘을 쓰는 게 낫겠다!’
한기는 옥좌에 몸을 파묻듯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흐흐흐…, 그렇단 말이지. 대략 600년 역사를 가진 이 나라는 이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건가? 비 오는 날 나막신에 밟힌 지렁이도 해보는 꿈틀거림조차 못해보고서? 뭐, 아버님과 할아버님 때에도 제대로 해본 건 없었지.’
한기의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뜨거운 눈물이 얼굴 위로 주르륵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