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자타국의 마지막 군주>
‘할아버님은 반파국의 도움을 받아 백제군에 대비해 성을 만드셨다. 아버님은 직접 두 차례나 사비성에 가셔서 어라하를 뵙고 신라에 대비할 대책을 논하셨고. 우스운 건 그 자리에 참석한 변한의 다른 나라 사신들은 모두 신하들이었지. 군주가 직접 온 경우는 아버님이 유일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서 사비성에 간 걸 안 뒤에 신라의 왕이 이 나라를 대신 지켜주겠다며 파병했구나! 아버님! 아버니임!’
한기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사신과 신하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쩌면 선대 한기들이 신하들과 백성들을 설득해 세금을 올려서라도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어쩌면 백제와 신라, 두 나라 중 하나에 찰싹 붙든 해서 태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이 나라를 신라의 왕에게 넘기고 처자식과 함께 서라벌로 가는 거다. 아아, 난 강제로 머리를 깎이고 승려가 되지 않는 걸, 처자식과 생이별하지 않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사신은 한기의 마음을 읽었는지 한기가 마음속으로 한 질문에 답변했다.
“뭐…, 금관국의 구형왕 전하를 보십시오, 한기. 아, 구형왕 전하가 아니라 상등(上等) 김구형 공 말입니다, 하하하! 이 김구형 공의 셋째 아드님이신 김무력 공께서는 지금 잡찬(迊湌)까지 오르셨습니다, 하하하! 물론 우리 대왕과 당신 가문을 위해서 전공을 많이 세우신 덕분이시지요. 한기의 아드님께서도 훌륭히 장성하신다면 김무력 공처럼 되실 겁니다. 아, 화랑으로서 경험과 인맥도 먼저 쌓고 말이지요, 하하하!”
한기는 이젠 무덤덤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다 포기한 듯했다.
“소오, 생각할 말미를 주시오. 내일 아침에는 답을 주겠소.”
“예, 한기! 저와 함께 금성에 가셔서 대왕을 알현하시기를…, 하하하!”
사신은 끝까지 거만하게 말하고 웃으면서도 읍하는 건 잊지 않았다.
사신이 정전을 나가자 한기는 신하들에게 조회를 마치겠다고 했다.
폐회를 선언하는 한기의 말에는 매가리가 없었다.
남강 일대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에는 마치 하늘이 갖다 놓은 것처럼 크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역대 한기들은 기쁜 일,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술상을 차리고 신하들과 즐겼었다.
그런데 사신이 한기에게 자타국을 들어 신라의 왕에게 바치라고 하고서 다음 날, 대저택을 경비하는 자들과 고용인들은 한기의 시신을 그 바위 밑에서 발견했다. 한기의 부인이 남편을 찾으라고 지시하고 얼마 뒤였다.
“한기께서 신라 사신과 저 바위 쪽으로 가시는 걸 봤습니다! 새벽에요!”
“저 바위 쪽에서 사내 둘이 말다툼하는 걸 들은 것 같습니다요, 공비님!”
대저택의 안마당에서 한기의 부인과 함께 이런 증언을 경청하던 사신은 꽥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