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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8. 2024

 카스가노츠보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쇼군의 웃음을 따라 여러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들이 덩달아 크게 웃었다.


오직 임오관만이 웃지 않으면서 쇼군을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흠흠! 그럼 우리 인쇄술로는 남만인(南蠻人: 서양인)의 것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없는가?”


“예, 쇼군. 우리는 활판 위에 한지(韓紙), 아니 와시(和紙)를 놓고 사람 머리카락을 뭉쳐 만든 인체(印體)로 곱게 문질러주니까요. 아마도 우리 종이와 남만 종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든 것 같습니다, 쇼군.”


“그거 말고는 특이한 점이 더 없다고 하던가?”


임오관이 잠시 눈알까지 굴려가며 생각하더니 쇼군께 답을 올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 다 말씀드린 것 같네요. 헌데 활판에 종이를 놓을 때 기계에 따로 달린 틀에 고정을 시켰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거 참 요물이었다고, 아니 편리했겠구나 싶더군요. 종이를 인체로 문질러줄 때 종이가 밀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서 처남더러 우리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완성했다는 보고가 없었나?”


쇼군께서 짐짓 엄하게 하문하시자 임오관이 뒤통수를 긁으며 쭈뼛쭈뼛 대답했다.


“시작도 못했거든요.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バテレン: 가톨릭 사제) 추방령’을 내렸잖습니까. 덴쇼 15년(1587년)에요. 그 명령에 따라 남만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서 그 기계도 가져간 겁니다. 기술을 배운 일본인 신자들도 데려가 달라고 애걸했다는 이유로 싹 데려갔고요. 실은 평범한 신자들과 달리 쓸모가 있으니까 그랬겠죠.”


“저 괘씸한 바테렌 놈들…! 쓸모 있는 백성들은 기어코 끌고 갔군!”


어느 하타모토가 분노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임오관은 쇼군이 그 하타모토를 잠시 지그시 쳐다보시다가 자신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시자 말을 이었다.


“그러니 처남의 기억만으로 그 기계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래서는 어려웠죠. 게다가 하시바 그놈은 제 양자(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까지 마구 죽이는 실성한 놈이었잖습니까. 그러니 감히 그놈 눈 밖에 날 짓을 할 수가 없었고요. 더군다나 말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처남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일도 벌어졌거든요.”


“호오, 도대체 무슨 일이었기에…?”


쇼군께서 흥미가 동하셨는지 한쪽 무릎을 세우시며 하문하셨다.


임오관이 말투에 침통함을 섞어 답을 올렸다.


“책들을… 남만의 기계로 만들어낸 책들을 모두 불태운 겁니다, 쇼군! 하시바 그놈이 트집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요! 정 아까우면 간기(刊記: 판권)를 뜯어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 없게 하고서 숨기든가요.”


이쯤에서 임오관은 말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며 술병을 빨았다.


“처남도 그 책들을 만드는 데 크든 작든 힘을 보탰다 보니, 마치 제 자식들이 죽거나 신분을 감춰야 하는 꼴을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파했습니다. 덕분에 술과 담배에 빠졌고요. 이것이 훗날 처남이 사망한 이유까지 되었습니다. 소인 또한 속상해서 어느 날 폐하께서 공방을 방문하셨을 때, 감히 뛰쳐나가 이에 관해 아뢰었습니다. 하아,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쇼군께서 마치 가부키 배우의 중요한 대사를 경청하려는 관객처럼 귀를 쫑긋하시고 열렬히 바라보시자, 임오관은 한껏 고조된 투로 말을 이었다.


“하아, ‘하시바 그자가 짐의 말마저 듣지를 않은 지 오래다!’라고요.”


“그럼 조부의 치세가 시작된 뒤에 다시 시도하면 되지 않았겠는가?”


쇼군의 이 하문에 임오관이 또 쭈뼛거리며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예…, 쇼군…, 초대 쇼군(도쿠가와 이에야스)께서 텐카닌(天下人: 일본의 지배자)이 되신 뒤에는… 말이지요, 소인들이 전수한 조선식 인쇄법에 다들 적응해서 남만의 인쇄기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처남마저… ‘다 잊었는데요!’ 하면서 시큰둥해하더군요. 그러니 소인도 포기했죠.”


쇼군께서는 임오관의 태도를 보시며 그가 어쩐지 진실을 고하지 않는다고 여기시는 듯했다. 이렇게 기록을 하던 나도 느꼈던 거니까.

 하지만 임오관을 신뢰하시던 쇼군께서는 이에 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셨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재취(再娶: 재혼)한 과정을 묻고자 했는데, 계속 잊었구먼. 자네가 들려준 인쇄 기술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로워서 말이야, 하하하! 그래, 자네는 어쩌다 시노부와 혼인하기에 이르렀는가?”


쇼군께서는 이번에도 임오관을 향해 고개를 내미시며 관심을 보이셨다.


유모 카스가노츠보네 님께서 만드신 오오쿠(大奥)에 온 나라의 미녀들을 모아놓고 장난감처럼 고르실 수 있으신 쇼군께서는, 은근히 백성들의 소박한 연애담에 관심을 보이셨다. 당신께서 평생 경험해 보실 일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흰 쌀밥과 도미 요리만 먹던 다이묘가 가난한 백성이 먹는 메밀죽과 무절임을 별미로 여기듯이 말이다.


“예, 쇼군.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노부는 저희 조선인 공장(工匠: 기술자)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해주려고 고용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여인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일본인 공장들의 처나 누이였죠. 가계에 한 푼이라도 보탤 생각이었던 겁니다. 당시 시노부는 앞서 서방들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들마저 일찍 죽어 처남을 제외하면 피붙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안 좋은 일들이 많았던 여인이라 시노부는 열심히 일했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아픔을 극복하리라고 여긴 것 같았어요.”


임오관이 측은하고 애절한 표정을 짓자 쇼군께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신다는 투로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으음, 어쩐지 후쿠(카스가노츠보네의 본명)가 생각나는구먼. 후쿠도 과인의 유모가 되기 전에 어린 자식들과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헤어져야 했더랬지. 그래서 과인을 양육하는 등 여관(女官)으로서 열심히 일했지. 아픔을 극복할 생각도 있었을 거야. 그게 다 출세에 환장한 그녀의 못난 서방 때문이었다고 하던가.”


마침 쇼군께서는 이즈음 건강이 크게 안 좋아지신 카스가노츠보네 님을 걱정하며 크게 상심하고 계셨다.

카스가노츠보네 님께서는 이 당시에 쇼군께 붙을 병마들이 당신께 붙는 게 낫다면서 의원들이 처방하는 약마저 끊으신 터라 더욱 그러했다.


쇼군은 카스가노츠보네 님을 친어머님보다 더 어머님처럼 여기셨다. 아우이신 타다나가 님과의 후계자 경쟁에서 이기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셨으니까.

특히 카스가노츠보네 님께서 슨푸 성에 머무시던 초대 쇼군을 찾아가 현 쇼군을 후계자로 삼으셔야 한다고 직소(直訴: 규정된 절차를 무시하고 윗사람에게 직접 호소)하기까지 하신 건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사건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쇼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카스가노츠보네 님의 옛 부군인 이나바 마사니라 공을 경멸하는 자들도 많았다.

초대 쇼군께서  현  쇼군의 유모를 간택하시겠다고 선포하셨을 때, 이나바 공은 당신과 자제분들의 출세를 위해 일부러 이혼장까지 쓰게 하며 카스가노츠보네 님더러 이에 응하라고 강요했다는 소문이 있어서였다. 아니 땐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나겠는가.


그런데 이나바 공을 힐난하시는 쇼군을 바라보는 임오관의 표정이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어쩌면 그의 처 시노부의 옛 서방 중 하나가 조선을 침략한 하시바 군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니까 임오관은 시노부의 옛 서방도 ‘출세나 전리품에 환장해 제 분수를 잊은 못난 자’라고 외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기요마사 공을 흠모하는 하타모토들이 많아서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다. 임오관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런 임오관에게 쇼군이 먼저 말씀하셨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의 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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