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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8. 2024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예, 처남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쇼군.”


이쯤에서 임오관이 우물쭈물하자 어느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가 대신 답을 올렸다.


“아마 도이치 사람인 ‘구텐베르크’라는 공장(工匠: 기술자)이 만든 기계라 사료됩니다, 쇼군. 소신도 오란다(オランダ: 네덜란드) 사람이 보여준 책에서 봤습니다.”


쇼군과 임오관이 동시에 그 하타모토에게 주목했다. 역시나 사토 공이었다.


“호오! 그럼 자네는 그 기계를 어떻게 쓰는지도 아는가?”


소신도 그것까지는…. 도이치 말을 몰라 읽지는 못하고 그림만 봤을 뿐입니다. 소신에게 그 책을 보여주면서 팔려고 했던 오란다 사람도 일개 상인인지라 인쇄술에는 관심이 없던 자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쇼군!”


사토 공은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서인지 와들와들 떨었다.


쇼군은 그런 사토 공을 보시며 입맛을 다시고 헛기침만 하셨다.

하타모토가 받는 녹봉이 적지는 않다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 휘하에 고용인들까지 두어야 하기에 빠듯하다는 걸 잘 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차마 ‘왜 그 책을 사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렇듯 불편한 분위기를 깬 이가 임오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쇼군. 그 기계를 어떻게 쓰는지 처남이 설명을 해줬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이게 다 소인에게 치매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임오관이 변명하듯 말하자 쇼군도 크게 웃어주셨다. 임오관이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자신의 제자나 다름이 없던 사토 공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임을 쇼군도 짐작하셨으리라.

사토 공도 영민해서인지 이를 깨닫고 임오관에게 감사를 표하는 표정을 보였다.


“호오! 역시 임오관 자네는 인쇄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구먼.”


쇼군이 칭찬하시자 임오관은 오른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하하! 이게 다 처남이 그 기리시탄(キリシタン: 기독교인) 승려들 밑에서 일을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죠. 목수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가 과로로 병이 나 쫓겨난 뒤의 일이었다고 했죠.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싶어 눈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더군요.”


“으음, 그래서 기리시탄 승려들이 자네 처남의 곤란한 처지를 알고 포교를 했군. 사악한 요괴 같은 것들….”


“아, 예, 쇼군, 그런 경우였지요! 아, 거,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장수를 잡으려면 말 먼저 쏴라’는 말이요! 원래는 기리시탄 여인네들이 시노부가 기리시탄 절에 다니게 하려고 했다더군요. 아름다운 시노부가 기리시탄 절에 다니면 사내들도 덩달아 다닐 거라는 속셈이었겠죠. 허나 시노부가 냉소해서 뜻을 못 이루자 처남을 노렸다더군요. 처남이 제 누나의 말을 잘 듣는 데 주목한 거죠.”


“허허, 기리시탄 여인네들은 싸움이 나면 칼부터 뽑는 사내들보다 낫구나.”


쇼군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여긴 몇몇 하타모토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 대다수는 농담으로 하신 걸 알기에 다들 크게 웃어드렸다.


“흠흠, 그래서 자네 처남은 일을 배우려고 기리시탄을 믿는 척했다 이 말이지, 임오관?”


“그렇습니다, 쇼군! 물론 더욱 수준 높은 기술을 배우려면 저들과 아주 많이 가까워져야 했죠. 그래서 시노부에게도 기리시탄 절에 다녀보라고 권했다더군요. 남매가 함께 기리시탄 절에 다닌다면 저들이 처남을 한패라 믿고 많은 걸 가르쳐주리라 여긴 거죠.”


임오관의 주장은 쇼군께서 그의 처남을 향해 품으신 의심을 거두지 않으셨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 같았다.

즉, 임오관의 처남인 ‘류’라는 자에게는 남만(南蠻: 서양)의 신을 향한 믿음이 일절 없었음을, 그런 마음을 가진 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자비로우신 쇼군께서는 임오관의 애절한 이야기를 믿어주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임오관은 여전히 불안한 것 같았다.


하긴 시마바라에서 기리시탄들이 일으킨 난이 진압될 때 얼마나 많은 기리시탄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던가를 임오관도 들었을 터이니 기리시탄에 관한 임오관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혹시라도 처남이 기리시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면 임오관이 반드시 버리도록 강요했으리라.


“그래서 자네 처남은 무슨 일을 배웠는가?”


“예, 쇼군. 처남이 말하기를, 남만 사람들이 만든 활자는 거푸집을 만들 때 덩어리 쇠를 철심으로 깎고 다듬어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같은 목수가 할 일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남만 사람들이 인쇄에 쓰던 기계는 흡사 기름을 짜는 틀 같았다고 했어요. 남만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애당초 술 만드는 데 쓸 과일즙을 짜는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손되거나 낡아서 교체해야 할 부품이 나올 때마다 처남이 나섰다고 합니다.”


“자네 처남은 눈썰미가 좋았는가?”


“예, 쇼군. 소인이 보기에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렇기에 남만 사람들의 경계를 사서 그 기계를 수리할 때 입회시키지는 않고, 망가진 부품과 그림만 보여주면서 똑같이 만들라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뭘 어떻게 조립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경험을 쌓고, 매일 구운 떡(빵)과 술과 고기를 먹는 등 좋은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걸 배워보려던 기대를 만족시키지는 못해서 실망했다더군요.”


“흥! 역시나 자기네 신을 믿는 자들은 평등하다고 하면서, 정작 일본인들을 바다 너머로 팔아버리던 자들답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쇼군. 남만 사람들이 금속활자를 깎거나 인쇄기를 만드는 기술을 일절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고, 자기네가 필요할 때만 찾으니 이 때문에도 처남이 기리시탄 승려들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들은 포교를 하려고 일본에 왔으니, 자기네 종교를 알릴 문서들을 진서나 히라가나(平仮名) 활자로도 찍어내야 했죠. 그런데 활자의 거푸집을 독실한 기리시탄들에게만 만들라 했다더군요. 그래서 처남은 끼어들지 못했고요.”


“그러니까 자네 처남처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기리시탄 절에 다니는 게 빤한 자들에게는 중요한 일을 안 맡겼구먼. 그렇다면 자네 처남은 단 한 번도 그 기계를 다뤄본 적이 없었겠구먼, 에잉!”


쇼군께서는 임오관의 처남 이야기에서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듯이 혀를 차셨다.


임오관은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기계를 돌려볼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쇼군. 작업해야 할 게 많을 때에는 처남더러 놀지 말고 일을 도우라면서 투입했다더군요. 덕분에 저들이 안 가르쳐주려던 걸 알아서 배울 수 있었고요.”


“호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임오관이 자세를 고치고서 말씀을 올렸다.


“기계의 주요 부품으로는 활판을 놓는 자리와 누름틀, 손잡이들 따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기계 아래에 있는 바퀴처럼 생긴 손잡이를 돌리면 활판을 놓은 자리가 그 위에 놓인 종이를 고정한 틀과 함께 누름틀 아래로 들어가고, 누름틀 바로 위에 있는 길쭉한 손잡이를 잡아 당겨주면 누름틀이 종이를 누르면서 글자가 찍혔다고 하더군요. 이 기계를 쓰면 짐승가죽에도 인쇄가 가능했다고 하고요.”


“허허, 그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짐승 가죽에도 글을 인쇄할 수 있다니, 대단한 물건이다! 문득 말이야, 조부의 말씀이 떠오르는군. ‘백성들은 참깨와 같으니 세금을 한번 짜기 시작하면 계속 나온다!’라고…, 남만인들의 인쇄기로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마구 짜내는 게 떠오르는군, 허허허!”




구텐베르크식 인쇄기 https://www.printmuseum.org/gutenberg-press


https://www.reddit.com/r/PropagandaPosters/comments/34q8ds/colonial_powers_by_thomas_theodor_heine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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