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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8. 2024

 세종대왕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하오나 쇼군, 온 나라에 보급할 책들을 금속활자로 찍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직지심체요절』을 수백 년 전에 금속활자로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증명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가 하려던 질문은 ‘두 작업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같은 것이었으리라. 허나 감히 폐하께서 하신 사업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니 에둘러 말한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그래서….”


쇼군께서 역시나 다음과 같은 어명을 연이어 내리신 것을 보면 당신께서 나아가실 때와 멈추셔야 할 때를 잘 아시는 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하지. 임오관!”


“어업, 소어군!”


시녀가 물려준 꼬치구이를 맛있게 먹고 있던 임오관이 화들짝 놀라 꼬치를 문 채 외치며 넙죽 엎드렸다.


닭 뼈다귀를 씹던 개와 같은 그 모습이 하도 재미나서 쇼군께서는 또 한바탕 크게 웃으신 뒤 임오관에게 하명하셨다.


“이자들에게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만든 책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하라! 이들 모두 검술과 행정에서는 유능하지. 그러나 인쇄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 물론 당연한 거지만….”


임오관이 입속 오리고기를 급히 우물거려 삼키더니 쇼군의 하명을 따랐다.


“누군가가 종이에 쓴 글을 본으로 삼아 제작한 목판으로 인쇄하거나 사람이 직접 필사를 할 경우 글자의 모양이 일정합니다. 나리들께서도 서체만 보면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있으시잖습니까? 하지만 『직지심체요절』은 다양한 서체가 혼용되었습니다. 이는 전조(前朝: 고려)의 백성들이 새 왕조가 개국하기를 기원했을 정도로 온 나라가 혼란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인쇄에 사용한 활자 중 대부분도 기존에 관청 같은 데서 제작해 둔 것들을 끌어 모았다고 하더군요. 혹은 공방이 있던 흥덕사에서 글을 알던 자들 여럿이서 급조하든가요. 이런 특징은 『직지심체요절』에 사용된 활자들이 오와 열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는 건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목제활자도 쓰였다는 얘긴가?”


어느 하타모토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하고서 묻는데도 임오관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예, 나리. 조선의 언문(諺文: 한글)과 달리 중원에서 들여온 진서(眞書: 한자)는 글자의 수가 너무나 많아 벌어진 일이랍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런 목활자들을 모본(母本)으로 삼아서 만든 거푸집에 금속을 녹여 부어 활자를 만들었고요. 하지만 당시에는 나라의 사정이 어려워 절에서 구할 수 있던 금속이 부족했다죠. 모본도 당시에는 목재가 아니라 귀한 밀랍으로 만들어서 재물이 많이 들었고요. 그럴 땐 나리의 말씀대로 목활자로 보충했다고 합니다.”


“흠! 그렇다는 건 그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도 온전히 금속활자로 찍어낸 건 아니라는….”


그 하타모토가 비웃듯 일갈하자 쇼군께서 그자를 매섭게 노려보셨다.


그자가 죽을죄를 진 걸 깨닫고 넙죽 엎드렸다.


그 뒤 아무도 임오관에게 잡담을 던지지 않았다.


쇼군이 눈짓하시자 임오관은 설명을 이었다.


“인쇄용 목판을 제작할 때는 목판에 글자를 바로 새기기에 오와 열이 잘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딱딱 맞습니다. 하지만 『직지심체요절』처럼 크기가 제각각인 금속활자를 활판에 끼워 넣어 조립했다면 오와 열이 맞지 않거나, 심지어 기울어지는 일도 발생하죠. 더군다나 전조 때에는 활자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는 않아서 활판에 밀랍을 발라 활자를 고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쇄물의 품질이 영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은 활판에 밀랍을 바르지 아니하는가?”


또 다른 하타모토가 진심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물었다. 사토 공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조선이 막 개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활자의 아래가 추(錐)처럼 뾰족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리 만든 게 아니라 마감 처리를 제대로 못 한 게 아닐까 싶네요. 활자의 크기가 일정하지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세종대왕께서 제작을 명하신 경자자(庚子字)부터는 아래가 평평해졌죠. 세종대왕께서는 활자의 크기도 똑같게 하신 데다, 구리로 된 활판도 개량하셔서 활자를 쉽게 끼워 넣을 수 있도록 하셨고요.”


질문을 했던 사토 공이 “호오!” 소리를 냈다.


임오관은 그 반응을 기꺼워하는 듯했다.


“그래서 활자와 활자 사이의 작은 틈들 따위를 공목(空木)으로 메워주기만 하면 활자들이 활판 위에서 잘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딱딱 맞춰 섭니다. 이렇듯 세종대왕께서 진행시키신 사업 덕분에 오늘날 책에서는 『직지심체요절』과 같은 거친 모습을 보기 어렵죠.”


하타모토들 자리의 여기저기서 “세종대왕이라는 조선 왕은 정말 대단하군!”, “오오!” 같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사토 공이 또 질문했다.


“그런데 활자를 하나씩 활판에 배열한다면 말인데…, 그 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활자를 거꾸로 끼우거나, 엉뚱한 활자를 끼우거나, 빼먹는다거나 하는….”


사토 공이 또 묻자 임오관도 신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흡사 영특한 제자에게서 좋은 질문을 받은 스승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습니다, 나리. 그래서 『직지심체요절』에는 그런 경우가 왕왕 보입니다. 대감(大監)이 견감(犬監)으로 둔갑해 버리는 식이죠. 물론 저희 인쇄공들도 조선에서 살적에 그런 경우가 발견되었을 때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치도곤을 맞았고요. 그런데 역으로 이런 점이 ‘『직지심체요절』은 곧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 셈이죠. 새옹지마(塞翁之馬)에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랄까요.”


“으음,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금속활자는 목제활자나 목판과 성격이 다르지는 않는가? 말인즉, 목재는 먹물을 흡수하지만, 금속에는 닿자마자 흘러내릴 게 아닌가? 인쇄를 할 때 설마 같은 먹을 쓰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나리. 금속활자로 인쇄할 때는 오동나무나 비자나무의 열매에서 짠 기름을 태워 얻은 그을음으로 만든 유연묵(油煙墨)을, 목판으로 인쇄할 때는 소나무를 태워 얻은 그을음으로 만든 송연묵(松煙墨)을 씁니다. 송연묵은 먹의 농도가 진하지만, 유연묵은 안 그렇죠. 게다가 종이에 송연묵으로 쓴 글자를 잘 보시면 먹물이 글자 주변에 번진 걸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유연묵으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에는 그런 게 없죠.”


“으음, 교토에서 사시는 쿠교우 분들께서도 함부로 보실 수 없는 책이야! 그런 책을 내가 감히 어떻게 보겠는가. 폐하와 쇼군께서 신임하시는 그대를 믿어야겠지.”


“감사합니다, 나리.”


임오관이 고개를 꾸벅하며 설명을 끝내자 쇼군께서는 박수를 치시며 하문하셨다.


“그런데 임오관, 자네 처남은 기리시탄(キリシタン: 기독교인) 절에서 인쇄 일을 배웠다고 했잖은가. 기리시탄의 인쇄 방식은 조선식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구먼. 기리시탄도 금속활자를 쓴다고 자네 처남이 말하던가?”


“예, 기리시탄 절에서도 금속활자를 썼다고 처남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리시탄 절에서 일하던 기리시탄 승려들은 인쇄에 아주 거대한 기계를 썼다고 하더군요.”


“아주 거대한 기계?”



<월인천강지곡> 활자판 (복원품) https://www.kh.or.kr/brd/board/696/L/menu/314?brdType=R&thisPage=1&bbIdx=1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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