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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8. 2024

선조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그렇죠. 심지어 한양 남쪽에 있던 군기시(軍器寺)에서는 화약이 터졌던 모양입니다. 천둥소리보다 더 큰 폭음이 군기시 쪽에서 들렸거든요. 땅도 흔들렸고요. 혹자가 말하기를 조선이 개국한 이래 차곡차곡 비축한 화약 수만 근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더라고요! 덕분에 이 일본 땅에서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지진이 날 때마다 어디서 화약이 터졌나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그렇게 막대한 화약을 비축하고도 싸울 생각을 안 하다니! 조선 왕이라는 자는 도대체…!”


쇼군이 조선 왕을 가리키시며 혀를 차시자, 한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가 말을 보탰다.


“쇼군, 조선 도성 앞 큰 강가에 주둔하던 조선의 수만 대군(大軍)은 정찰을 나갔던 저희 병사 두 명이 강에서 멱을 감는 것만 보고도 거미 떼처럼 달아났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저희 측은 200명도, 20명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그런 얘긴 과인도 들었었다. 조선군 장수들이 너무 오랫동안 싸움을 겪지 않아서였다는 자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비겁한 변명이다. 조선 북방에서는 반조쿠(蛮族: 여진족)가 침범하여 조선 백성들을 잡아가고, 조선 남방에서는 저 쓰시마와 규슈 일대의 해적들이 제 집 드나들 듯 날뛰었는데, 어찌 전쟁을 겪어본 장수가 없었겠느냐! 규슈에서 해적질로 먹고 살았던 놈들은 이순신보다 정걸이라는 장수에게 이를 갈더라. 고지(弘治) 원년(1555년)에 조선의 전라도에서 정걸에게 무참히 패했고, 같은 해에 제주도에서는 김수문이라는 장수에게 대패해 저 제주도를 해적들의 근거지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면서 말이다.”


쇼군께서 이렇듯 일장 연설을 하시니 하타모토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습니다!”를 연발했다.

 개중엔   이렇게 외치는 하타모토도 있었다.


“정걸, 김수문, 이순신 같은 무시무시한 괴수 삼대장(三大将)들이 있었고, 화약도 그렇게나 많았는데 제대로 써먹지 못한 조선 왕의 무능이 아주 대단합니다! 그런 자가 왕이 되었으니, 조선에는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쇼군!”


이 말은 어쩐지 임오관더러 들으라는 것 같았다.


쇼군께서는 그들의 잡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신 다음 말씀을 이으셨다.


“임오관도 언급한 ‘신립’이라는 장수 또한 반조쿠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다는 맹장이었다. 딱하게도 고니시 유키나가 공의 대군을 반조쿠 무리 정도로 보고서 함부로 덤볐다가 최후를 장렬하게 맞이했지만 말이다.”


쇼군의 말씀에는 신립과 같은 장수를 항복시켜 일본의 장수로 만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이를 눈치 챈 다른 하타모토들이 앞 다퉈 의견을 아뢰었다.


“쇼군. 조선군 중에 오리나 닭 무리 속의 학이나 봉황 같은 자들, 특히 이순신 같은 자들이 소수 있었으나, 절대다수는 전쟁 전부터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매수당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무능함과 추태를 보였다죠. 정작 조선 왕에게서 벼슬을 받지 못해 지방에서 소일하던 여러 사무라이들이 자기 마을의 백성들을 모아서 싸웠을 뿐인데도, 우리 군을 상대로 용맹을 떨친 경우가 많았고요.”


“그렇습니다, 쇼군! 특히 붉은 옷을 입고 날뛴 사무라이와 싸웠던 자들은 지금도 붉은 것만 보면 경기를 일으킨다더군요. 조선 왕이 이렇듯 훌륭한 사무라이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면서 쓰레기들을 요직에 임명한 덕분에 우리 일본은 이 임오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조선인 공장(工匠: 기술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잖습니까! 그러니 조선 왕은 우리 일본의 은인입니다! 조선 왕을 모시는 신사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곳 신관과 무녀로는 조선인을 임명해야겠구려.”


이 말에 쇼군과 모든 하타모토들이 크게 웃었다.


오직 임오관만 웃지 않았다.


쇼군은 임오관이 웃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시고 헛기침을 하시며 정색하신 뒤 임오관에게 다시 하문하셨다.


“화약이 터진 사건 뒤에 자네는 가토 기요마사 공에게 잡힌 건가?”


“예, 쇼군. 임금님이 달아나시고, 장수들도 뒤를 쫓아 달아나니 누가 왜 목숨을 바쳐 한양을 지키려 하겠습니까? 일본군이 한양 성 밖에 이르자 성문도 안 닫고서 다들 자기 집에 꽁꽁 틀어박혔죠. 소인을 비롯한 인쇄공들은 수십만 점에 달하는 다양한 금속활자들을 포장하고, 피난길에서 먹을 식량을 구하려고 대궐 안의 수라간과 곳간을 뒤졌고요. 물론 거기서 일하던 자들이라든가 지키던 병사들도 모두 사라지면서 한 무더기씩 가져간 덕에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요. 뭐, 그럭저럭 준비가 끝나서 금속활자들을 우물에 감추려 할 때 일본군이 나타났습니다.”


술김에 한참을 떠든 임오관은 또 한참을 쉬었다. 피난 준비를 다해놓고서 단 한 발짝 늦는 바람에 붙잡혔다는 사실이 떠올라 분한 것 같았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 공이 한양에 입성하기 하루 전에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 공이 입성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임오관을 비롯한 인쇄공들은 결국 한양을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물론 투기했던 금속활자들도 도로 건져내야 했을 것이고 말이다.


이를 잘 아시는 쇼군께서는 임오관을 위로하셨다.


“기요마사 공 특유의 괄괄하면서 급했던 성품을 고려하면 자네는 아주 적절한 때에 기요마사 공에게 잡힌 걸세. 자네들이 이미 피난길에 올랐거나, 기요마사 공이 한양에 입성하면서 시답잖은 저항에라도 부딪혔다면 아마 자네들은 학살을 면치 못했을 게야.”


쇼군의 이 말씀에 임오관은 아무 말 없이 구겨진 종잇장 같은 표정을 짓고서 술만 들이켰다. 그러더니 대뜸 쇼군께 아뢰었다.


“저, 쇼군! 소변이 마렵습니다!”


“하하하! 술을 그토록 많이 들이켰으니…. 어서 다녀오게!”


임오관은 일어나 허리를 굽혀 절하더니 시녀를 따라 변소에 갔다.


쇼군의 눈짓에 하타모토 하나가 거리를 두고서 임오관의 뒤를 밟았다.


쇼군께서 우려하셨던 것과 달리, 임오관은 아무런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돌아왔다.

 그가 난생처음 들어왔던 이 드넓은 에도성이 아마 자력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한 미궁(迷宮)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임오관이 다시 착석하자 쇼군께서는 시녀들에게 새 술병을 더 가져오라 하셨다.


“자네의 몸은 술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군! 아주 힘센 사무라이처럼 말이야! 과연 얼마나 마셔야 취할지 궁금하네, 하하하!”


“소인이 힘든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쇼군. 구리와 쇠를 녹여 부어 활자를 만드는 일부터 활판을 짜고 먹을 묻혀 종이로 찍어내기까지, 그 모든 일을 일일이 감독하거나 직접 해야 하니까요. 시노부도 소인더러 건강을 생각해 적게 마시라 했죠. 하지만 소인이 얼마나 고되게 일하는지를 잘 알았기에 차마 끊으라는 말은 안 하더군요. 처남도 소인처럼 고되게 일했기에 말술을 했고요.”


“이렇게 힘들여 일하는데도 조선의 왕은 자네들에게 박한 대우를 했구먼. 하지만 폐하와 조부께서는 자네들을 후하게 대하지 않으셨던가?”


쇼군이 임오관더러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임오관이 또 조선에 가겠다며 소란을 피울까 봐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임오관은 쇼군과 알현하는 내내 아주 귀한 술을 흡족하게 마셔서인지 쇼군의 이 말씀에 전혀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임오관의 반응에 흡족하신 쇼군께서 박수를 치시자 이번에는 시녀가 야생오리의 살을 꼬치에 꿴 구이와 도미찜을 올린   소반(小盤: 작은 상)을 가져왔다.


“들게. 안주가 변변치 않아서 계속 술만 들이키는 것 같아 걱정했거든. 자네 입에 맞지 않을까 염려되는구먼.”




세종대왕의 어명으로 만들어진 갑인자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9D%98_%ED%99%9C%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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