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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7. 2024

고요제이 덴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물론 구리처럼 무른 금속만 써서도 안 되고, 철처럼 녹이 잘 스는 금속만 써서도 안 됩니다! 다양한 금속을 잘 버무려 써야 하죠.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듯이 말입니다!”


“그래, 사람을 쓰는 것처럼… 말이지.”


쇼군은 임오관이 헛소리처럼 내뱉는 말에서 교훈을 찾으시려는 것 같았다.


“그렇죠! 막말로 말해서 쇼군 혼자서 이 나라를 다스리실 수는 없잖습니까! 여기 계신 하타모토(旗本: 도쿠가와 막부의 상급 가신) 분들도 있어야 하잖습니까! 아, 그러니까 쇼군이 구리라면, 하타모토 분들은 아연, 납, 철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서는 구리가 가장 중요하죠! 저 금이랑 은 다음으로 귀한 구리가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금속들도 적당히 섞어주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얼마 못 가 획이 뭉개져 못쓰게 되거든요. 아, ‘견마지로(犬馬之勞)’라 써야 할 게 ‘대마지로(大馬之勞)’처럼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달이 나면 열심히 일하고도 매타작을 당했죠.”


임오관의 비유를 듣고 나를 포함한 여러 하타모토들은 조용히 고개를 꾸벅 숙여 임오관에게 경의를 표했다.


쇼군을 모시는 가신인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게 해주어서다.


그런데 쇼군께서는 임오관의 말 중 마지막 부분에 흥미가 동하신 것 같았다.


“열심히 일하고도 매타작을 당했다니?”


쇼군의 하문에 임오관은 가슴속에서부터 치솟는 분노를 삭일 생각에서인지 또 술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두 병을 연거푸 비우고서야 쇼군께 답을 했는데, 이때 임오관의 말투에는 비통함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예, 소인이 조선에서 일할 때는요…. 상을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소인 같은 공장(工匠: 기술자)들은 신분이 양인이어도 천민과 같은 취급을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대갓집 머슴만도 못한 취급을 당했다 이 말입니다! 심지어 책에 오탈자가 하나라도 나오면 그 책을 담당했던 관리가 큰 벌을 받았는데요. 그러니까 오탈자 하나가 발견될 때마다 그 관리가 곤장을 한 대씩 맞은 겁니다. 하아 참! 세상 정말 더러워서!”


임오관은 말끝에 분명히 욕을 붙였다.


하지만 그 욕은 절대로 쇼군을 향한 게 아니었기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임오관은 이를 확인시켜 주려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제 주장을 이어갔다.


“예, 정말 더러운 세상에서 소인들은 살았습니다! 그 관리가 일이 그리된 걸 저희들 탓으로 돌렸으니까요! 덕분에 저희는 몇 배로 매타작을 당했다 이 말입니다! 볼기짝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요! 심지어 장독(杖毒)으로 죽은 자들도 수두룩했죠! 그래서 책이 출고되는 날이 다가오면 정말 불안했습니다.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먹히더군요.”


“그런 환경에서 참 잘도 일했군. 그래, 무사안일하게 작업을 했겠어.”


쇼군이 혀를 차며 위로하시자 임오관은 눈물을 훔치며 주장을 이어나갔다.


“그렇죠. 더 잘해보려고 노력하기보다 그저 오늘도 매 안 맞고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면서 일했죠. 그렇게 사는 게 저희들 팔자려니 하면서요. 좋은 결과가 나온들 오롯이 감투 쓰신 분들의 공이 됐고요. 그런 분들 휘하에 있던 저희들 손에는 겉보리 한 말이라도 더 주어지리라 기대할 수도 없었고요. 쇼군, 소인이 여기 와서 가장 크게 놀란 게 뭔지 아십니까? 폐하께서 저희가 일하는 곳을 둘러보신 겁니다!”


“큰 소리로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


쇼군께서는 하타모토들을 의식하셔서 임오관에게 이리 명령하셨으리라. 분명 하타모토들 중에 어떻게든 교토에 있는 조정에 줄을 대고 있는 자들이 있을 테니까.


임오관은 자세를 가다듬고 점잖게 대답했다.


“소인을 비롯한 조선인 인쇄공들이 조선에서 저희와 함께 온 활자들로 활판을 짜던 때였죠. 아마 『고문효경』을 만들던 때였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폐하께서 직접 인쇄소를 방문하신 겁니다! 임금님이 공방(工房)을 방문하시다니! 조선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죠! 감독을 하시던 분들의 지시에 따라 공방 바닥에 넙죽 엎드리고 있었죠. 그때 소인 쪽으로 오셔서 뭐라 하신 것 같았습니다.”


이 순간 임오관은 잔뜩 긴장한 채로 쇼군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땐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전혀 못 알아들었죠. 폐하께서 치하의 말씀을 내리셨다는 걸 나중에 역관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 말씀 덕분에 소인이 하는 일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인지를 알았죠. 크게 감격하기까지 했고요. 조부에게서 들었던 옛일마저 생각났으니까요.”


“옛일? 조선에서 있었던 일인가?”


“예, 무려 100년하고도 반백 년쯤 전에 있었던 일이라죠. 그러니까 세종대왕 시절인데…, 그땐 소인 같은 공장들도 조선 땅에서 섭섭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장아무개(장영실)’라는 분은 손재주가 뛰어나 노비 출신인데도 감투를 쓰셨다죠. 앞서 말씀드렸듯이… 칭찬은커녕… 일을 잘못했다고 치도곤을 맞지 않으면 다행이던 소인 같은 공장들에게는… 세종대왕 시절이 정말 좋은 시절이었던 겁니다.”


“허어, 조선의 세종대왕이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나은 왕이라는 얘기는 왕왕 들어왔네. 그런데 자네 말대로라면 고대 중원의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훌륭한 임금이 아닌가?”


임오관을 기쁘게 해주시려고 세종대왕을 추어주신 쇼군의 의도대로 임오관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선비님들이 왕왕 언급하시는 ‘주나라 시절’의 임금님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일본에 끌려와 세종대왕 시절이 다시 왔음을 느꼈으니 어찌 소인들이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심경이 더욱 복잡했죠. 숫제 어떤 이는 기가 막힌다는 투로 ‘우리가 가토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냐?’고 묻기까지 했죠.”


몇몇 하타모토들은 ‘가토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냐?’라는 말에 입술을 단단히 붙이고 두 눈과 두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로쿠·게이초의 역 때 조선에서 크게 활약한 가토 기요마사 공을 존경하는 이들이었다.


쇼군께서는 그들 하나하나를 꾸짖듯이 삼엄하게 노려보신 다음 임오관에게는 호탕하게 말씀하셨다.


“하하하! 폐하께서 그만큼 자네들이 하던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뜻이네. 그러니 기뻐하게! 아니, 우리 일본이 자네들을 조선에서 데려온 가토 공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게 옳겠군, 하하하!”


쇼군의 말씀에 임오관도 애써 웃음으로써 공감을 표했다. 그런데 이때 임오관의 태도가 등짝에 칼날이 드리운 걸 느낀 백성들이 ‘만세!’를 외치는 꼴 같아 우습기도 했다.


“예, 쇼군. 소인도 그런 뜻으로 말씀을 하신 걸 알아듣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소인의 재주를 알아주시고 대가도 후하게 치러주시는 분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큼 보람찬 일도 없으니까요. 다만 소인이 이러는 게 소인의 고향인 조선을 위해서 잘하는 일인가, 그런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네.”


쇼군의 말씀에 임오관이 두 눈을 크게 뜨고서 표정만으로 ‘무슨 말씀이신지?’라고 물었다.


쇼군이 이렇게 답을 내려주셨다.


“조부(도쿠가와  이에야스)께서 세상을 뜨시기 전에 과인을 불러 이런 가르침을 주셨지. 아주 먼 옛날, 대륙을 정복한 어느 위대한 대황제(칭기즈칸)의 신하(야율초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셨지. ‘칼로 천하를 장악할 수는 있지만, 칼로 천하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폐하!’라고. 전국시대를 몸소 겪으시고, 이를 직접 종식시키신 조부신지라 그 신하의 주장에 공감하셨다더군. 칼로 천하를 다스릴 경우, 언제든 자신의 칼 솜씨를 믿고 일어나는 놈들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역시 이에야스 님은 부처님처럼 깨우침을 획득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하타모토의 아부에 쇼군은 씩 웃어 보이시고서 말씀을 이으셨다.



에도 시대의 활판 https://mag.japaaan.com/archives/1873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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