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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23. 2024

꿀물이 든 병

불국사의 십자가

       

그날 오후에 예림 부인도 오셨습니다.


아아, 그야말로 천상의 선녀가 지상으로 하강하신 듯했어요!


안 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나 봅니다.


갑자기 뒤통수에 돌을 맞은 것처럼 아파서 뒤를 돌아보니 안 선생이 주먹으로 절 때린 거더군요.


“왜 때려요!”


소승이 성을 내니 안 선생이 빙긋 웃더군요.

뭐, 소승더러 미색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었겠지요, 하하하!


헌데 예림 부인 또한 안 선생이 마음에 드셨나봅니다.

 김대성 공께서 인사시켜주시는데 처음엔 슬쩍 보시곤 얼굴을 붉히시더군요.

봄바람에 피어난 진달래처럼 말이지요!


그날 이후 예림 부인께서는 사나흘마다 몸종들과 함께 술과 떡을 해오셨습니다.

 작업자들을 위한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따로 꿀물 한 병을 안 선생을 위해서 가지고 오셨어요.

안 선생은 늘 두어 모금만 마시고 나머진 제게 주었지요.

 ‘병을 깨끗이 씻어서 돌려드려야 한다’면서 소승에게 병을 소제하게 했던  덕분에  소승은  꿀물을   잔뜩   마실 수 있었답니다.

 꿀이 산에서 나는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요.


소승이 소제를 서둘러 마치고 가면 두 분의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당시 소승은 어려서 왜 그런지를 못 깨달았지요, 하하하!

 역시나 어느 날 예림 부인께서 대놓고 말씀하시더군요.


“소제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스님. 허나 너무 서둘러서 하시니 아니 하심만 못하더군요.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소승은 그제야 예림 부인께서 뭘 원하시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우물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예림 부인을 뵌 날에는 안 선생의 얼굴이 아주 환했고요.


 그러면서 5년인가 지났습니다.

석굴암의 주실이 완성되었지요.

김대성 공께서는 이를 부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법회를 여신다고 하셨습니다.


예, 공자.

예림 부인께서 동무 분들과 함께 본존불상께서 앉아계신 연좌 주변을 돌기로 하신 거지요.

헌데 마치 뭔가에 쫓기듯 김대성 공께서는 행사 준비를 서두르시더군요.

소승은 표훈 스님이 공께 길한 날을 알려주신 거라고 여겼고요.


허나 이 이상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지요.

당시 소승은 안 선생의 종자 노릇을 관두고 불경 공부와 절의 일에 매진했거든요.

안 선생의 시중은 다른 동자승이 맡았습니다.

 하지만 종종 안 선생을 볼 일은 있었는데, 그때마다 안 선생의 얼굴이 환하더군요.

 극락에 든 사람처럼 말이지요.


법회가 열렸습니다.

주실에는 예림 부인과 동무 분들만 들어가고, 스님들과 고관대작 분들은 전실에 계셨어요.

 법회가 진행되는 내내 안 선생은 전실 바깥에 쌓아둔 석재에 앉아   당신   신과의 ‘대화수단’을 두 손으로 쥐고서 계속 중얼거리더군요.

안 선생 나름대로 예림 부인과 그녀의 부군을 위해 치성을 드린 거겠지요.


헌데 그렇게 따로 기도를 드리던 안 선생은 다음 날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이 돌로 된 ‘대화수단’만을 오래간만에 함께 자던 소승의 머리맡에 남기고요.

부야 스님도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 없이 불국사를 떠나셨습니다.

예림 부인도 그날 경주에서 사라지셨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호사가들은 김대성 공께서 예림 부인께 막대한 재물을 쥐어주시고서 안 선생과 함께 바다 너머로 보내셨다더군요.

예림 부인이 더 이상 부군의 그림자나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눌려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셨다면서요.

 물론 안 선생이 도망치듯 떠나온 당나라로 가신 건 아닐 거고…, 천축 아니면 왜국으로 가시지 않았겠냐고 했지요.


훗날 김대성 공께서는 안 선생이 예림 부인을 흠모하는 걸 알고 계셨고, 예림 부인도 안 선생에게 마음을 여신 것도 아셨다고 임종하실 때 소승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야기를 마친 노승은 그날 밤 입적했다.

 김연우 공은 노승의 장례까지 치러주고 상경하여 태조를 알현하고 이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허나 당시 거란과 정안국 때문에 북방의 사정이 어지러워 태조께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신라의  토기류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32_0040_003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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