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복궁이 싫다. 화면으로나 실물로나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여러 맛집과 근사한 장소들이 모여 있는 종로를 거닐다가 광장에 멈춰 서서 광화문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치워버리고 싶을 만큼 싫다.
현재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경복궁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1395년 수도를 옮기면서 창건한 궁궐이 아니다. 그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다른 궁궐들과 함께 불타서 사라졌다. 몽진을 떠났던 선조가 돌아온 뒤로는 창덕궁을 다시 지어 본궁의 역할을 맡겼고, 경복궁은 1865년에야 흥선대원군의 추진으로 1867년에 재건되었다. 당시 조선은 소수 가문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와 삼정(토지세, 병역을 납세로 대체하는 군포,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게 하는 환곡)의 문란으로 인한 재정 악화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이를 타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조선 조정은 경복궁을 다시 지을 비용을 마련하려 상민부터 양반까지 신분에 상관없이 돈을 걷었다. 이를 "원납전"이라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낸 기부금이라는 뜻이었다. 1만 냥을 내면 평민에게 벼슬을 주고 10만 냥을 내면 수령에 임명하는 등의 보상도 있었으나 실상은 강제 징수였다. 그래서 원납전은 "원(願)" 자를 원망한다(怨)는 뜻으로 바꾼 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고도 비용이 부족하여 논밭에 매기던 기존의 조세 외에 "결두전"이라는 부가세를 추가로 걷고, 도성의 사대문에 통행세를 부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강제로 동원하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조선 조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 화폐 단위인 당백전을 새로 발행하였다. 화폐 가치를 조정하고 재정난을 극복하려는 목적이었다. 명목상 기존에 사용하던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5~6배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화폐가 대량으로 시장에 나오자 당연히 사람들은 당백전을 불신하였다. 상평통보를 당백전으로 교환하기를 꺼려 상평통보도 사용하지 않았고, 물물교환이 다시 성행하였다. 그 바람에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폭등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궁궐을 다시 세워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인다는 명목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경제 파탄까지 초래한 셈이다.
경제의 약화는 곧 국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조선은 신미양요의 피해를 미처 복구하지 못한 채 운요호 사건을 겪고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별기군 창설 이후 구식 군대의 군인들에게 줄 봉급도 없어서 임오군란을 초래하였다. 종국에는 당시 세계로 마수를 뻗치던 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대내외적으로 극도의 혼란이었던 고려 왕조의 문을 닫고 각종 개혁과 왕씨 학살까지 단행하면서 민본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려던 조선은 결국 말기에는 자신들도 고려 말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행태를 보이다가 경술국치라는 치욕적인 종말을 맞았다. 해방 이후로도 훼손과 복원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경복궁은 과거의 실정과 부끄러운 역사의 징표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어차피 조선은 언젠가 망했겠지만 적어도 같은 결말을 되풀이하지는 않도록 후세에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는 있다. 경복궁은 싫지만 이 나라가 어떤 역사를 겪고 현재에 이르렀는지 되새기려면 그곳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함께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자 관광지이니 외화벌이 수단으로써도 잘 관리해서 유지해야 할 것이다.
표지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