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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생 Nov 24. 2024

절망과 회피

여자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 깼다.
햇빛이 방 끝까지 깊게 들어와있다.
'이런 시..'
욕을 하려다 입을 다문다.
욕을 해서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을.
잔액을 확인하고 거래내역을 확인해 보니 이건 동생 짓이다.
외국으로 가기 전,
동생에게 정말 힘들 때 쓰라고 체크카드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현듯 생각이 스친다.
'보험은?'
서둘러 눈을 비비고 보험회사에 전화해 보니 외국에 있어 안내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번 달 내로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으면 실효될 예정이라고 한다.
갑자기 큰돈이 빠져나간다.
대출을 받고 싶지만 일도 안 하니 쉽지 않다.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한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가만히 있다가 열이 뻗쳐 옷에 입을 깊숙이 묻고 소리를 지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열이 받아 시작한 거지만 나중엔 아파서 더 소리를 질렀다.
'진짜 나한테 왜 그러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다 거지 같아..'
화가 강해지다 점점 사그라들며 허탈해졌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덮고 있는 옷을 머리끝까지 올려버렸다.
갑자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머리가 웅웅대며 지끈거린다.
이럴 때 여자가 잘하는 게 있다.
회피.
여자는 이번에도 도망친다.
다급히 해결해야 할 일만 해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손을 놓아버린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살아갈 계획도.
일주일 동안 밀린 티비를 밤새 보았다.
어차피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 일어날 때마다 고통이 엄청나기 때문에 먹지도 씻지도 않고 그저 텔레비전 속 화면만 보고 있다.
보고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저 도망치기 위해,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멍하니 계속 채널을 돌려가며 티비만 보고 있다.
마음속에선,
'이렇게 살아서 뭐해. 이렇게 살 이유가 있나.'
'하지만 죽는다고 뭐 달라져?'
'그렇다고 이렇게 사는 건 의미가 있어?'
'아 됐어. 생각조차 하기 싫어.'
이런저런 마음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다가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2주째가 되니 여자는 바짝 말라버렸다.
잘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으니 몰골이 거지가 되었다.
아침에서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된 어느 날.
채널을 돌리기 위해 리모컨을 드는데 손이 발발 떨리자 여자는 그제야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기운이 없어 눈을 뜬 시간보다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이러다가는 혼자 고독사를 할지도 모른다.
'난 죽고 싶은 건가?'
오랜만에 생각이란 걸 해보는 여자다.
입을 떼고 싶은데 말라서 잘 떼지지 않아 입술에 힘을 주니 비릿한 피 맛이 혀에 맴돈다.
'죽고 싶으면 그냥 한방에 죽을 수 있는 방법들이 있을 텐데.'
'난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지?'
순간 자신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살고 싶은 마음이란 걸 깨달은 여자는 꺼이꺼이 괴성을 지른다.
울고 싶은데 몸에 수분이 없는지 나오지는 않고 괴상한 소리만 난다.
'으어억 거거억.'
여자의 회피 시간이 끝이 났다.
이 상황이 힘이 드는 거지 죽고 싶은 건 아니었던 거다.
살고 싶은 마음을 2주 만에 확인했다.
여자는 손을 뻗어 물을 찾는다.
집안에는 굴러다니는 페트병과 편의점 도시락에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나마 겨울이라 다행인 걸까.
여름이었으면 벌레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여자는 몸을 일으켜본다.
'어?'
거의 2,3일에 한 번씩 일어나고 계속 누워있었더니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일어나 다리가 삐걱거리지만 이 정도면 걷기에도 무리가 많이 없을 것 같다.
여자는 일어나 처음으로 집안을 서서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금세 집안 쓰레기들을 모두 치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이완시키고 오랫동안 샤워를 한다.
'이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우선 일을 찾자.'
여자는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생각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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