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과의 만남
로마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서 로마로 들어오면서 멀리서 공사 중인 듯했지만 뭔가 다른 질감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벤허’에서나 봄 직한 폐허가 된 중세 마을 같았다. ‘아빠, 저기가 어디야?’라며 첫째 조사자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내 눈은 더 커져 있었다. 지나가다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저 어마어마한 곳은 도대체 무엇일까? 당일 시내투어를 하면서 궁금해했던 의문이 풀렸다. ‘포로 로마노’였다. ‘포로(Foro)’라는 말은 ‘공동 광장’이라는 뜻이고 ‘로마노’는 로마사람, 즉 로마사람들의 광장으로 풀이하면 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영어 '포롬(Forum)'이 '포로(Foro)'에서 나온 말이란다.
유적지란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거리 구경을 하듯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하마 가이드는 포로 로마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포로 로마노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내려다 보이는 유적 하나하나가 모두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등 전반적인 기능을 했던 로마의 중심지였다. 고대 로마의 중요한 건축물들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왕정 시기, 공화정 시기, 로마 제국 시기까지 정부 기관, 신전, 사원이 지어지면서 중심지로의 역할을 한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바실리카’를 짓고 원로원과 재판장을 모두 이곳으로 옮겼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다시 확장시키면서 이후 약 200년간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중심이 되었다. 하나 의외였던 이야기는 이곳이 침수되기 쉬운 습한 저지대였다는 것이다. 많은 왕들이 지속적으로 간척하고 메우면서 단단한 평지로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을 하였지만 티베르 강이 끊임없이 범람하여 토사물이 쌓이면서 이곳의 지면은 점차 높아져갔다고 한다. 그래서 맨 아래 묻힌 고대 포로 로마노의 유적물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며칠 후 콜로세움 투어 때 직접 가서 볼 거라고 설계자는 귀띔을 해줬다. ‘다행이다’ 안심을 하며 다음날을 기약하고 오늘은 어차피 피로도 누적되어 얼른 하마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마 가이드는 퀴즈까지 내면서 포로 로마노에 대한 설명에 열정을 다했다. 퀴즈는 황제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 뭐냐는 거였다. 참가자 중 어느 누구도 퀴즈를 풀지 못했다. 상품을 걸었기 때문에 하마 가이드는 돈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정답은 티투스 개선문이었다. 티투스 개선문은 81년 티투스가 사망 후 황제로 즉위한 동생 도미티아누스의 명에 따라 건립되었는데 티투스가 70년 예루살렘 전에서 승리한 모습을 다양한 조각품으로 만들어 황제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기념비라고 볼 수 있다. 아치형 천장에는 티투스가 거대한 독수리의 날개에 앉아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새기며 황제가 사후에 신격화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마 가이드께서 준비해 온 로마 이야기 중 기원전 44년에 이곳에서 우리가 시저로 알고 있는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시저는 절친이던 브루투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브루투스의 연설로 상기해 볼 수 있었다.
로마 시민들이여! 친구들이여!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시오.
나의 명예를 믿고 침묵하여 나의 말을 들어주시오.
이 자리에 시저의 절친한 친구가 있다면 그에게 말하겠소.
브루투스가 시저를 사랑한 마음은 그대의 것과 다르지 않소.
만약 그대가 왜 시저에게 반기를 들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이것이오.
‘나는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차라리 시저가 살아서 모두가 노예로 살기를 바라겠소, 아니면 시저가 죽고 모두가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겠소?
시저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는 그를 위해 울었소.
그는 운이 좋았기에 나는 기뻐하오. 그는 용맹했기에 나는 그를 존경하오.
그러나 그는 야망에 가득 찼기에 나는 그를 죽였소.
(3막 2장 20-29), 브루투스
시저를 죽인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그는 로마를 사랑했기에 시저를 죽였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후에도 로마 시민들은 시저를 여전히 사랑했기에 시저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안토니우스는 시저를 기리는 신전을 지었다. 시저가 남겼다는 명언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들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시저가 죽기 직전 남긴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명언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시대의 영웅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기억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이 남아 우리는 과거를 마주하고 대화하면서 현재를 또 미래를 만들어간다. 포로 로마노는 과거 천 년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에 위대한 폐허로 남아 지금까지도 살아 움직이는 영웅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