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의 위대함
히치콕의 위대함은 영화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한 차원 올려놓은 데 있다. 특정한 예술의 기법 혹은 양식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던지 간에, 결국 모든 예술언어의 발전의 기원은 예술가의 개인적 욕망과 비전에 있음을 망각하면 안 된다. 알프레드 히치콕이라는 이름을 현대영화를 열어젖힌 거장, 서스펜스의 아버지 등등으로 거창하게 수사(修辭)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몹시 따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히치콕이 과연 자신의 영화사적 의의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모든 걸작들을 창조한 것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내게 히치콕의 영화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널리 찬양받는 기법과 테크닉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끈적끈적하고 때로는 저열한, 그의 개인적인 욕망과 어둠이다.
따라서 글의 첫머리에 히치콕의 위대함이 영화언어의 확장에 있다고 서술한 것은 다양한 기법을 폭넓게 구사하고 발명한 그의 장인적 기질보다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예술가 본인의 욕망을 기어코 스크린에 새겨 넣는 그 특유의 과단성과 용기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히치콕의 영화를 볼 때면 거의 완벽한 리듬에 의해 구축된 이야기를 감상하다가도 때때로 히치콕 본인과 생생하게 마주하는 것 같은 기묘한 순간들이 나타날 때가 있다. 물론 히치콕 이전에도 창작자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위대한 영화들이 종종 있긴 했으나 이야기의 쾌감과 흥분, 그리고 상업적 고려를 동반하는 영화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여기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언급을 빌려오자면 알프레드 히치콕은 ‘상업영화에서의’ 최초의 작가주의 감독이다. 그 말은 즉슨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천박한 이야기를 만들면서 거기에 영상언어가 지닌 물성(物性)을 바탕으로 예술가 본인의 근원적 공포, 불안, 유혹 그리고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을 동시에 투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재능 이전에 용기가, 영상언어에 대한 완벽한 이해 이전에 자신의 심연을 향한 치열한 탐구가 있어야 하는 일이며 히치콕의 전성기 이후로 그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요컨대 히치콕이 남긴 걸작들은 개인의 모호한 심리와 심지어는 무의식의 어둠까지도 다양한 창의적인 접근을 통해 극영화의 언어 안에 매끄럽게 녹여낼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영상언어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깊이를 더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새>는 가장 독창적인 영화이자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다. 주로 인간의 죄의식과 욕망을 다루던 히치콕은 한 독특한 단편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소설은 새들이 먹이가 부족해져 인간을 공격한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의 빈약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히치콕이 이 평면적인 이야기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히치콕은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이고 친근한 존재가 우리를 공격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설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압박해오는 무형(無形)의 공포의 근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딛는다.
(下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