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바라보는 히치콕
(上편에서 이어짐)
히치콕은 새가 사람을 공격하는 원인에 대한 설명을 과감히 배제한 후, 새의 공격이 재앙으로 표면화되는 생일 파티 장면까지 약 영화의 절반을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채워 넣는다. 장르적으로 로맨스라고도, 코미디라고도, 스릴러라고도 볼 수 없는 앞의 절반은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으로 팽팽하지만 사실상 새의 공격과는 표면적으로 별다른 상관이 없어 보인다.
히치콕의 많은 영화들은 특정한 영화적 순간을 구현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인물들이 그 순간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 간결하고도 효율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인물들의 개성이나 배경, 사연 등은 이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최소화되며 맥거핀과 유사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새>는 정반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히치콕은 ‘새들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간단한 한 줄에 갖가지 설정과 인물들의 전사(前事)를 우겨넣음으로써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가장 중요하게 여길 새들의 공격 원인은 완전히 제외하고서 말이다.
보데가 베이라는 이상한 해안 소도시와 샌프란시스코, 잉꼬와 까마귀, 금발의 이방인, 남편을 잃고 실의와 트라우마에 빠진 노인 등등... 히치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설정과 대립되는 이미지들을 겹겹이 쌓아올린 후 그냥 멈춘다. 그리고 갑자기 새들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새>는 사실상 히치콕의 걸작들 중에서 뒤의 절반보다 앞의 절반이 더 중요한 유일한 영화이다. 히치콕은 새의 무차별 공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이 극도의 영화적 스릴을 느끼게 만들지만, 동시에 관객이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자연스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새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새>는 바로 여기서 새롭게 출발한다. 우리가 앞의 다양한 요소들을 새의 공격과 끊임없이 연관 지으며 머릿속에서 의미의 거미줄을 치기 시작할 때 <새>는 ‘무의미의 의미’라는 역설을 창조하며 우리를 또 다른 무력감에 빠트리는 것이다. 외래종을 향한 적대감, 외지인을 향한 열등감, 노인의 심리적 트라우마, 전 애인의 새로운 여자를 향한 질투심, 새와 인간의 관계 역전... 이 영화에서 새의 공격은 다층적 알레고리로써 다양한 의미로 읽어낼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히치콕은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웅성대게 하면서 아무것도 확증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미지의 공포 혹은 재난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불행의 원인 혹은 의미를 생산하느라 여념이 없다. 불행은 그냥 그곳에 존재하며 운명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히치콕은 각종 영화적 암시로 관객에게 다양한 출구를 열어놓은 채로 완벽에 다다른 자신의 영화적 장기를 마음껏 뽐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해한 불행을 맞이하는 우리의 본성을 응시한다.
<새>가 공포의 액션이 아니라 공포를 맞이하는 인물들의 리액션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은 차 안에서 미치의 어머니가 멜라니를 안고 토닥여줄 때 거의 확실해진다. 이 쇼트는 인간의 심연을 그려내며 냉소적인 화법으로 죄의식과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던 그의 이전의 영화세계와 충돌하는 느낌을 준다. <새>에서 히치콕은 나름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인물은 단지 맥거핀에 가까우며 대신 눈부신 창의력으로 무장한 영화적 효과가 주인공이었던 그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공포의 스펙터클의 이면에서 사랑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때로는 갈등을 빚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히치콕이 국제적 명성과 상업적인 성공을 이룩한 뒤에 만든 <새>는 영화적 스펙터클에 대한 조금은 다른 접근처럼 보인다. 그는 물론 이 걸작에서도 영화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새>는 정말 재미있고 무섭다. 그러나 동시에 <새>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의 파멸적 스펙터클로부터 도피하고픈 그의 개인적 욕망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조물주처럼 쥐고 뒤흔들었던 그는 이제 조금씩 인간을 바라본다. 그는 이제 인간의 보편적인 나약함으로 눈을 돌린다. 내게 <새>는 히치콕의 영화들 중 가장 다층적이고 인간적이며 히치콕의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매력적인 걸작이다.